98년 퇴임한 오형근 전 불교학 교수

“난 지금 ‘행복한 강의’를 하고 있다네.”
지난 98년 퇴임한 후 재임 때 하지 못한 학문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대학문화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오형근(불교학) 교수.
오 교수는 강의에 쫓기거나 행정적 업무에 지치던 재임 때와 달리 아무것에도 구애됨 없이 연구할 수 있는 지금이 즐겁다. 그는 불교를 포교하기 위해 일반인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불교 서적을 써야겠다는 결심을 한 지 오래지만 백발이 성성해진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불교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고 말한다.

“현재 불교 연구는 인도나 중국쪽으로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한국불교학에 관한 연구가 없어 변변한 전서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 교수는 ‘금강삼매경론’등의 번역 작업을 통해 한국불교계를 시초부터 정리해나가겠다고 한다. 때문에 자신의 전공인 유식학을 넘어 불교의 전반적인 부분까지 꼼꼼히 노트해 가며 공부하고 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평생 불교 교육에 매진해 많은 제자를 배출했지만 본교에 오 교수의 학문을 이을 후학을 양성하지 못한 채 떠난 것이라고 한다.
“후학들이 한국 불교를 잘 연구해 세계에 수출할 사상으로 키워 주기 바랍니다.”


4·19혁명 이끌었던 김칠봉 동문

1960년 4월 19일. “우리의 젊은 학우들이 깡패에게 맞아 죽고 나라가 망해가는 판국에 가만히 있어야 겠느냐”며 “정의를 위해서 궐기를 해야겠으니 나오시오, 일어나시오”라며 본교 강의실, 도서관 등을 반미치광이가 되어 뛰어다니며 울부짖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김칠봉(법58졸) 동문이다.
그의 말 한 마디에 동대생들은 물밀 듯이 밀려 경무대를 향해 달리던 중 총성이 들려왔고 앞장서던 농대생 40~50명가량과 노희두 군 등이 쓰려졌다고 한다. 결국 동대생들의 피를 보고 교수, 시민 등 전 나라가 일어났고 4·19는 역사의 한 장을 장식했다.
그러나 정작 4·19 혁명을 보도한 신문들은 주역을 서울대나 고려대 쪽으로 편향되게 보도했다. 본교는 가장 최선두에서 유혈충돌까지 벌였지만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아직도 이 점이 가장 가슴 아프다는 김동문.
현재 김동문은 본교 4·19 혁명동지회에서 수석부회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그는 진실을 알리기 위해 토론회 참석, 기고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지금도 밖에서 동국대가 내 모교라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성공적인 100주년을 맞이하기 위해 학내 구성원뿐만 아니라 학외 구성원이 함께 단결해야 한다는 김동문. 앞으로도 학교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 지속적인 활동을 해 나가겠다는 그의 말에서 동국의 빛이 보였다.


92년 전체 수석 졸업자 손승호 동문

대학생활에서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수석 졸업의 영광을 안고 사는 사람의 사회생활에서도 그 역시 ‘일등’일까. 지난 92학년도 전체 수석을 차지한 이후 그의 인생 역시 그야말로 ‘모범생’답게 꾸려가고 있는 손승호(경제92졸)동문.
그에게 지난 학교생활은 지금의 버젓한 사회인으로서 그를 있게 한 큰 버팀목이 됐다. “그 당시 경제학과 교수님들이 학점짜게 주시기로 소문났었는데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점수를 더 받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하나라도 더 알려고 했던 것이 도움이 된 것 같다”며 지난 학교생활을 회상하는 그의 모습에서 학교에 대한 애정과 겸손이 배어나온다.

현재 한국수출입은행 국별 조사실 차장으로 근무하며 아시아 국가들의 국가신용도를 조사하는 업무를 수행 중인 손동문. 실제로 이 분야에서 전문가로 인정을 받고 있어 방송국, 학회, 연구소 등에서 자료요청과 강의 요청이 끊일 날이 없다.
요즘도 봄에 꽃이 피면 학교 도서관 앞에서 바라보던 남산의 풍경이 생각나곤 한다는 손승호 동문은 학교와 후배들에 대한 애정 어린 충고도 잊지 않는다. “학교가 발전하려면 구성원 모두가 본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언제나 ‘최고’가 되고자 노력하며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손동문의 모습을 통해 학교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은 당당한 선배들의 열정적 모습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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