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불교철학자 나가르주나(용수) (A.D. 1-2세기경)

나가르쥬나(A.D. 1-2세기경)는 우리가 ‘반야심경’에서 만날 수 있는 공(空)을 논리적, 철학적으로 정립함으로써 그 후에 발달된 대승불교 철학의 기반을 놓는 데 기여한 분으로 동아시아 불교전통에서는 여덟 개의 불교종파의 종조로서 심지어는 제2의 부처님으로 추앙받아 왔다.

석존의 가르침 가운데는 존재의 세 가지 특징을 규정지은 3법인(法印)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인간이건 세계건 모든 것에 불변적인 실체가 없다(제법무아 諸法無我)는 것이다.
모든 것은 분리되고 고정되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과 연관되고 그에 의존하여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생멸하므로(緣起) 실체가 없으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일 뿐이다. 이것이 공의 의미이며, 오늘날의 과학으로 입증된 진리이기도 하다.
공의 진리를 단지 개념적으로가 아니라 직관적 체험으로 깨닫는 지혜를 반야(般若, prana)라고 부른다.

‘반야’의 ‘야’(jna)는 ‘knowledge’, ‘gnosis’등과 같은 어원을 가지며, ‘뛰어난’이라는 의미의 ‘반’(pra-)과 합성하여 일상적 지식과 다른 차원의 지식을 가리킨다. 일상적 앎은 예를 들어 ‘이것은 나의 차이다’라고 인식할 때 아는 주체인 ‘나’가 있고 그에 마주하여 ‘차’라는 대상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앎은 단지 객관적 인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 깊이 뿌리박고 있는 자기중심적 성향과 결합되어 나에 대한 집착(我執)과 대상에 대한 집착(法執)을 낳고, 그 집착이 우리를 속박하고 좌절과 불안, 불만족 다시 말하자면 고(苦)를 낳게 된다.
인간의 특성 중의 하나는 언어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이며, 언어로 인해 과거의 지식과 지혜가 기록되고 보전, 전승되며 문명이 발달되어 왔다. 그러나 이렇게 귀중한 것이지만 소중한 것이 대개 그렇듯이 언어가 주는 부작용도 크다.

언어가 가리키는 대상은 실제에 있어선 각각 특수한 것이고 고정된 실체가 없이 끊임없이 변화하여 가는 것이지만 시공을 넘어서 적용되는 언어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 마치 고정 불변하는 실체라고 착각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특정한 나무에 대해 ‘은행나무’라는 레벨을 붙이고 나면 그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자기동일성을 지닌 나무로 인식되고, 우리는 나무 자체를 보는 대신 ‘은행나무’라는 말을 나무 자체와 동일시하게 된다.

 더욱이 언어와 더불어 작용하는 인간의 사유는 본래 나뉘어져 있지 않은 유기적 전체로서의 실재를 이분화의 습성에 따라서 ‘같은 것과 다른 것’, ‘A와 A가 아닌 것’ 등으로 나눈 후에 그 각각에 실체성을 부여하게 되며 미혹된 우리의 주관에 의해 갖가지 언어적 허구의 그물을 짜내어 그 속에서 거짓 안전감을 느낀다. 나가르주나는 파사(破邪)의 논리로 인간을 언어의 질병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언어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석존께서 가르치신 5온ㆍ12처ㆍ18계ㆍ4제ㆍ12연기가 모두 부정되지만 그것은 법에 대한 집착을 끊게 하기 위함이며,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이 ‘궁극적 진리’(승의제)를 가리키는 ‘언어적 진리’(언설제)로서의 기능까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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