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古寺)

고사(古寺)
                              조지훈
목어(木魚)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西域) 만리(萬里)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시집 ‘청록집(靑鹿集)’(1946)에서

조지훈(1920-1968)은 시인이면서 한학자였고, 동양의 전통 사상에 깊은 조예를 가졌던 분이었다. 일찍부터 우리 전통 사상의 중요성에 눈을 떠,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해서 새로운 학문 세계를 열어놓았다.
이 시 역시 그런 동양적 너그러움과 한가로움을 잘 녹여놓고 있다. 상좌가 수양에 전념하지 않고 잠들었으니 수행자의 자세가 아니다. 그러나 행주와좌(行住臥坐), 우리들의 모든 행동에 수양이 아닌 것이 없다. 졸려 잠들었다면 그게 꼭 게으름 탓만일까? 밤새워 수행하다가 깜빡 든 선잠이라면 장주몽(莊周夢)의 오도(悟道)가 그 속에 있을 법도 하다.

부처님의 빙그레 웃는 모습과 서역 멀리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왔던 달마대사, 그리고 노을 아래 떨어지는 모란 잎은 하나로 어우러지면서 동자승의 정진(精進)과 해탈에 따뜻한 빛을 드리우는 것이다. 이 가을 날, 우리 동악(東岳)의 언덕에도 부처님의 미소 같은 햇살과 짙은 녹음(綠陰)이 발길마다 가득하다. 정진 끝에 깜빡 눈을 부친, 저 도서관의 학생들의 모습에서 ‘고오운 상좌아이’의 모습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임 종 욱
국어국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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