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해록

■ 표해록
중국표류 선비이야기
교조적인 조선 묘사

 

바다에 안나가 본 사람들은 모른다. 바다도 삶의 터전이라는 사실을. 삼면이 바다인 우리 역사에서 바다가 차지한 비중이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조선은 조금 특별한 사회이고 체제였다. 성리학을 주된 사회주도 논리로 삼고, 양반들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여 사회분위기가 역동적이지 못했고, 학문과 농업 외에는 천시하였으며, 특히 원양어업과 항해교역은 원천적으로 제한되었다.

이런 사회분위기에서 다양한 가치관을 경험할 기회는 드물었다. 극소수의 사람들, 예를 들면 사신단과 그들을 따라가는 공식 비공식 수행원들 뿐이었다. 그러니 기행도 없었지만 기행문학은 더더욱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우연이지만 막혀있었던 바다를 건너 중국의 강남지방에 상륙한  선비가 있었다.

그는 표해록의 저자인 최부(崔溥)이다. 호가 금남(錦南)인 그는 젊은 나이에 요직을 두루 거치고, 당대 최고인 김종직의 학맥을 이은 전형적인 선비이다.  제주도에 파견되었다가 부친상을 당해 1488년 성종 19년 1월 3일인 한겨울에 제주를 출항하였다. 그리고 풍랑을 만나  생사를 헤매면서 14일간 표류하다가 중국의 남쪽인 절강성 임해에 도착하였다.

모든 출입이 통제되던 때라 출몰하던 왜구로 오인 받아 죽을 뻔하였으나 그의 학식과 인품 덕분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곧 관헌들에게 인계된다. 그때부터는 일행들과 함께 명의 해안과 육지지역을 다니면서 사람들과 그들의 생활, 관리와 정치체제 등을 경험하고 관찰한다.
한편으로는 조선과 비교하여 장단점을 인식하고 평가한다. 이렇게 수도인 연경을 거쳐 고구려의 땅인 요동을 지나 꼭 6개월 1일 만에 귀국하였다.

그리고 왕명을 받고 청파역에 머무르면서 1주일 만에 힘들었던 표류과정과 중국에서의 다양한 경험, 견문을 책으로 엮었다. 그 후 1504년인 51세에 연산군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책은 처음에는 ‘중조견문기’라고 하였다. 하지만 곧 ‘표해록’이라고 고쳐지고 그 이름 그대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중국지역으로 가는 육로의 과정과 경험을 기록한 연행록은 여러편 되고,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들이 기록한 해사록 등도 여러 편 있다. 하지만 해로로 중국의 남방지역을, 그것도 표류라는 극한 상황을 체험하면서 기록한 것은 유일무이하다. 이 책은 3권으로 나뉘어져 있고 제1권이 바다에서의 표류와 도착과정을 기술한 것이다.

이 책은 학술적 문학적 가치에 반하여 크게 알려지지 않았고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최근에 서인범 교수가 번역과 주석을 상세하게 하여 책을 펴내 진면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우선 최부라는 인물을 통해서 조선조 지식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는 효성이 지극했고, 나라에 충성하였으며 책임감이 몹시 강했다. 절대절명의 상황을 맞으면서도 주체적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지도력을 발휘한다. 그의 다양한 체험과 날카로운 관찰력, 비판의식 덕분으로 당시의 한중항로의 실상을 확인하고, 바다의 시대적인 의미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조선조의 무지와 왜국의 활동 등은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명나라의 실용적인 생활태도와 자유로운 사고를 알 수 있으며, 오히려 조선이 더 교조적이고, 중국적 세계관에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기록물이 당시대에 큰 영향을 끼친 것 같지는 않다. 최부 자신도 가치관에 큰 변화가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조선조의 시대정신이 그런 행위와 사고를 수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표해록은 최부라는 세상경험이 부족하고  교조적인 지식인의 한계와 조선조의 비애를 동시에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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