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춘 원장

노무현. 2009년 5월23일 그의 비극적 자살은 대다수 국민에게 충격을 주었다. 비단 자살의 비극만이 아니었다. 대통령 당선부터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정치적 역정 자체가 비극이었다.

전국 곳곳에 마련한 분향소를 찾아 애도하고 추모하는 시민들이 수백만 명에 이른 까닭이다. 정치인 노무현이 ‘반칙과 특권없는 세상’을 제안하며 특히 강조한 것은 ‘공권력’의 상징인 검찰과 언론개혁이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평검사와의 대화에서 ‘검찰 개혁’ 의지를 밝혔고, 강금실씨를 파격적으로 법무장관에 기용했다.

언론개혁 또한 그가 후보시절부터 내세운 정치적 목표였다. 하지만 우리가 지켜보았듯이 그는 검찰도 언론도 개혁을 완수하지 못했다. 바로 그 결과다. 그 개혁을 이루지 못했기에 그가 개혁하려던 검찰과 언론으로부터 대통령에서 퇴임 뒤 집중 공격을 받았다. 그의 가족과 친척들이 한 중소기업인으로부터 받은 돈과 관련해 전직 대통령인 그는 검찰과 언론으로부터 조롱당할 만큼 조롱당했다.

그가 죽음을 선택한 직접적 요인이었다. 그래서다. 그의 비극적 죽음 앞에서 애도만 할 수는 없다. 추모 열기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도 없기에 더 그렇다. 그가 영면에 든 오늘은 정치인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부터 비극적 최후까지 톺아보며 무엇이 문제였는가를 정확히 짚어야 할 때다. 대통령으로서 노무현이 실패한 이유를 정확히 인식해야 한국 정치에 미래가 있다. 한국 정치사에서 노무현의 의미를 대통령 후보 경선과정부터 찬찬히 짚어보자.

비주류 대통령

어느새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다가오지만, 2002년 봄부터 솔솔 불던 ‘노무현 바람’은 당시 한국 정치의 희망이었다. 민주당 후보로 부산지역에서 거듭 낙선한 노무현은 한국 정치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던 ‘지역정당 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었고, <조선일보>를 비롯한 ‘유력 신문’과 각을 세우는 데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래서다. 노무현은 시민단체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희망을 주는 정치인’으로 꼽혔다. 당시 ‘바보 노무현’이 그의 애칭이었다.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노사모가 그를 ‘후원’했다. 후보시절 노무현은 그 기대에 부응했다. 경선과정 유세에서 노무현은 여론시장을 독과점한 신문들이 일방적으로 퍼뜨려온 온 경제성장 우선론과 달리 분배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가령 2002년 4월, 경기지역 후보 경선 연설에서 노무현은 “소득이 골고루 분배되지 않는 사회는 어느 때 불황이 올지 모른다”면서 “빈부격차가 작고 서민의 소비가 활발한 나라가 경제적으로 안정된 나라”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복지는 목적이고 시장은 수단”이라며 “복지정책을 통해 소득분배를 하고, 이 소득분배를 통해 건강한 소비를 늘리고 일자리를 만드는 새로운 정책이 추진되어야 한다”고 밝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기존의 신문 읽기에서 벗어나 신문개혁을 주장하던 정치인이 경제에 대해서도 ‘권위’있는 신문이 강요하는 고정관념을 벗어나 분배정책을 공약하는 모습은 적잖은 사람들에게 감동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바로 같은 이유에서 정치인 노무현은 신문들로부터 집중적인 비판을 받았다. 과거 신문들의 ‘김대중 죽이기’에 빗대 ‘노무현 죽이기’라는 말이 언론학계와 시민사회에서 나돌기도 했다.

학벌중심 사회에서 그가 상고 출신의 비주류라는 사실 때문에 노무현 바람은 더 커져갔다. 노무현은 한 신문과의 ‘대선주자 릴레이 인터뷰’에서 자신의 정책이 ‘하향평준화나 국가 경쟁력 저하를 초래할 것이란 우려’를 묻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며 “지속 가능한 성장정책은 분배와 함께 가야한다. 빈부격차가 크면 수요기반이 무너져 결국은 경제가 붕괴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서다. 당시 <한겨레> 정책평가단은 노무현 정책을 “재벌개혁→공정한 시장질서 확립→고도성장의 고리와, 적극적 일자리 창출→빈부격차 해소→중산층 확대→고도성장으로 이어지는 고리가 함께 맞물린 방향”이라고 분석했다(2002년 11월6일자 ‘선택2002 이젠 정책선거다’).

노무현은 선거 직전(2002년 12월9일)에 신문 인터뷰에서도 기자가 ‘부익부 빈익빈 심화 해소방안’을 묻자 자신 있게 말했다. “빈부격차 해소는 시대적 과업이다. 지속가능한 성장정책은 분배와 함께 가야 한다. 5년 안에 전 국민의 70%가 건강한 중산층이 되도록 하겠다. 이를 위해 연평균 7% 성장전략을 추진할 것이다. 부동산 투기만큼은 반드시 뿌리 뽑겠다.”

결실 없는 가을

문제는 대통령이 된 뒤 그의 정책이 시나브로 달라진 데 있다. 대통령으로서 첫 국정 연설(2003년 4월2일)에서 ‘분배 문제’를 ‘집값 안정과 사교육비 부담 경감’으로 대폭 좁혔다. 경제틀 자체를 바꾸겠다는 공약과 달리 두 가지 문제만 집중적으로 해결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 두 목표조차 실패했다. 현실이 생생하게 보여주었듯이 노무현 집권 5년 동안 집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았고―종합부동산세는 아파트 분양가 공개를 거부한 노무현 정부가 뒤늦게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로 입법했다―사교육비도 급팽창했다.

한편 노무현이 권력을 장악한 초기부터 자본과 그들을 대변해온 언론은 집요하게 그를 길들이기 시작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접근한 게 대표적 보기다. 결국 노무현의 경제정책 ‘전환’은 집권 다섯 달 만인 2003년 7월에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는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중장기 국가비전으로 설정했다. 대선후보 경선 때 ‘분배 중심’에서 후보 결정 뒤‘성장과 분배 동시 추구’로 옮겨간 경제정책이 대통령 당선 뒤에는 ‘성장 중심’으로 변질되었다. 그가 국민소득 2만 달러시대를 주창하던 바로 그 시점에, 경기도 부평의 30대 주부가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어린 세 자녀와 함께 고층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한 참극이 벌어진 것은 시사적이다.

노무현 정권 임기 말인 2007년, 마침내 1인당 국민소득은 환율 효과에 힘입어 2만15달러로 ‘2만 달러 시대’를 가까스로 여는 데는 ‘성공’했다. 삼성경제연구소와 <조선일보>가 강조한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는 달성했지만, 어떤가, 부익부 빈익빈은 되레 심화되었다.

‘바보 노무현’이 바람을 불러일으키던 후보 시절, 그가 내세운 공약과 정반대의 결과를 빚은 셈이다. 기실 경제 목표를 국민소득의 수치로 설정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허망한가는 1인당 국민 소득이 1995년 1만 달러 돌파 이후 외환위기에 직면한 1997년에 7300달러까지 하락한 사실, 2007년에 마침내 2만 달러를 넘어섰지만 2008년에 다시 환율 효과로 주저앉은 사실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추모, ‘바보 노무현’의 계승

표면적으로만 보면 집권 내내 노무현은 여론시장을 독과점한 신문들과 ‘감정적 다툼’을 벌였다. 하지만 정작 참여정부가 추진한 중요한 정책들은 그 신문들의 논조와 같은 게 많았다. 국민소득 2만달러시대라는 경제성장 중심의 국정목표, 이라크 침략전쟁, 비정규직 확산 법, 민주노총 죽이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이 그 보기들이다. 심지어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렇다. 가슴 아프지만 짚어야 할 것은 분명하게 짚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노무현의 뜻을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무조건 그를 지지하고 두남두는 일은 왜 그가 비극적 최후를 맞았는지에 대해 자칫 놓치기 쉽다. 대한민국의 내일을 책임질 젊은 지성인들에겐 더욱 그렇다. 바보 노무현과 대통령시절 노무현은 달랐다. 퇴임 1년 3개월 만에 비극적 죽음으로 국민들에게 다시 절절하게 다가오는 그의 모습은 대통령 시절 노무현이 아니다. 바보 노무현이다. 그를 올바르게 계승하는 일,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그가 실패했고 결국 그의 비극을 불러온 검찰과 언론개혁을 제대로 이루는 일이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벗어나 한국경제를 책임지는 정책을 구체적으로 마련하고 준비하는 일이다. 바보 노무현의 꿈을 벅벅이 구현하는 길, 바로 그것이 비극적 최후를 맞은 정치인 노무현을 옳게 추모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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