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수 교수(교양교육원) 서평칼럼

화려한 무릉도원, 거짓의 토대 위에 세워진 리프킨은 유능하다. 괴벨스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괴벨스와 달리 리프킨은 세상에 도움이 된다. 체체파리가 졸음을 쫓는 것처럼. 지난 30년간 리프킨의 활동은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었다. 기획소송과 강연을 통해 새로운 인공물을 겁 없이 함부로 세상에 풀어놓은 일에 딴죽 걸어왔다. 그 덕에  새로운 기술을 세상에 풀어놓을 때, 거쳐야 할 절차와 기록해야할 정보가 세상 여기저기서 조금은 늘어났다. 좋은 일이다. 정말로 좋은 일이다. 문제는 그의 의도다.

그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린 ‘엔트로피’의 마지막 부분에서 리프킨은 좀 더 균등한 부의 분배, 좀 더 분산된 사회구조, 태양에너지 활용 확대 등등을 주장한다. 동의한다. 아이디어의 기원과 사색의 깊이로만 치면 그가 인용한 다른 저자들이 대단하기는 하지만, 열정적으로 써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낸 것은 분명 리프킨의 공이다.

타임지의 소개 기사 제목대로 그가 “과학계에서 가장 증오 받는 인물”이 된 것은 주장 때문이 아니다. 그가 그의 주장을 “엔트로피”에 억지로 끼워 맞추기 때문이다. 맞다. 고립계의 엔트로피는 감소하지 않고, 늘어나거나 유지된다. 그런데 이 사실은 그의 주장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지구, 역사, 사회, 인간은 모두 그런 의미의 고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은이 : 제레미 리프킨
               이창희 역
펴낸곳 : 세종 연구원

여기서는 한 가지만 지적하자. 우리 지구는 태양으로부터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의 에너지를 받고, 그 만큼의 에너지를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로 방출하고 있다. 물론 그러니까 지구 내 엔트로피의 총량이 변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다. 아직도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류의 활동 때문에 지구에 엔트로피가 축적된다는 식의 말은 전제부터 틀렸다.

기묘한 점은 리프킨의 인용문을 분석해보면 그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몰랐을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하지만 중요한 대목에서 그는 과학용어와 일상단어를 마구 바꾸어 쓴다. 엔트로피는 무질서와 같은 것일까? 엔트로피 불감소 경향을 사례들을 들어 설명하다보면, 일상생활에서 무질서하게 된다고 느끼는 현상들을 거론하게 된다.

하지만 리프킨은 정의가능하고, 계산가능하고 때로는 측정할 수 있는 물리량인 엔트로피를 무질서로 비유하고는 개개인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불확실하고 혼란스럽다는 감정도 무질서로 호칭한다. 그리고는 엔트로피와 사회적 무질서를 의도적으로 같은 것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혼란스러울 정도로 현란한 것은 리프킨의 수사법이다. 그는 지구가 물질적으로 고립된 셈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은연중에 비물질적인 에너지 흐름은 무시한다. 그래놓고는 비물질적인 세계관을 세계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주범으로 지목한다.

엔트로피 증가과정을 물질들이 비슷비슷하게 흩어져 버리는 과정이라고 말했지만, 페이지가 한참 넘어간 다음에는 도시에 몰려 살지 말고, 넓게 흩어져 살자고, 부를 좀 더 균등하게 분배하자고 주장한다. 그 사이에서 리프킨은 엔트로피를 감소시켜야 한다고 열정적으로 역설하였다.

백번 양보해서 리프킨이 초자연적, 초과학적 통찰을 통해 물리량으로서의 엔트로피와 사회적 무질서 사이의 관계를 깨달았을 수도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 말들은 더더욱 이해가 안 된다. 좀 더 균질적인 사회를 만들어 엔트로피를 증가시키자니!

리프킨의 ‘엔트로피’처럼 리프킨식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책을 또 찾아볼 수 있을까? 그럼에도 나름대로 긍정적인 기여를 하기는 했으니, 이처럼 현대의 혼란을 보여주는 사례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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