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보드래 교수(교양교육원) 서평 칼럼

권보드래 교수
생존과 충족과 발전

한마디도 덧붙이고 싶지 않은 책이 있다.

그저 구절구절을 읽어줌으로써 전하고 싶은 책이. 중국의 대표적인 작가 루쉰은, 그 생애 자체로, 내게는 그런 책이다. 루쉰은 읽을 때마다 나를 심연에 처박는다. (실례지만 ‘아Q정전’ 외 몇 편은 빼고, 라고 덧붙이고 싶다. 나는 아직도 ‘아Q정전’이 왜 그리 위대한 작품이라는 건지 모르겠다.)

수업시간에도 종종 루쉰을 써먹지만, 몇 번 보면 진력나는 책들과 달리, 루쉰은 읽고 또 읽어도 고갈되지 않는다. 어쩌면 다케우치 요시미도 비슷한 생각이었을까.

“나는 스스로 끝없는 비애 속에 빠져 있었지만, 조금도 울분을 터뜨리지는 않았다... 다만 나 자신의 적막만은 떨쳐내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나에게 너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루쉰을 ‘적막’의 경험에서 읽어내기 시작한다. 신해혁명 후의 좌절, 그 와중에서 루쉰은 “홀로 벌판에 버려진 듯”한 적막을 느끼고 거기서 중국을 감각한다. 목이 터져라 외쳐대고 길을 가로막고 누구는 제 생명까지 던지지만, 사람들은 무심한 얼굴을 하고 허깨비처럼 오갈 따름이다.

처형당한 시신이 내걸렸을 때도 수군수군 번지는 소리란 갓 흘린 피가 폐병에 좋다는 둥 하는 야비한 비평뿐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다’. 나는 정의롭고 순결하지만 그들은 비열하고 불결하다는 생각은 있을 수 없다. 루쉰은 결코 선구자가 아니었다고 다케우치 요시미는 몇 번이나 지적한다.

지은이 : 다케우치 요시미 
             서광덕 역
펴낸곳 : 문학과 지성사
그는 진보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한번도 어떤 방향을 가리키지 않았다. 인간은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해방될 것이라고 여겼지만 ‘해방에 이르는 길은 그에게는 열려 있지 않았다’”세상에서 떠드는 어떤 해방의 길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친구가 있고 제자가 있고 가족이 있었지만 그는 평생토록 혼자 견뎠다. 온화한 성품이었다고 전해지지만 그의 글은 지독스레 신랄하고 전투적이다. 그는 단 한순간도 눈감지 않고 단 한 눈금도 에누리를 두지 않았다. 그는 어디를 향해 걷는 대신 다만 살아갈 따름이었으나, 한 걸음 한 걸음은 확고했고 절대 누구 곁에 서기 위해 제 길을 휘지 않았다.

다케우치 요시미의 ‘루쉰’은 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출판되었다. 루쉰 연구서라고 알려져 있지만 “루쉰의 소설은 재미없다”는 단언을 앞세운 기묘한 연구서다. 작자는 징집당해 전선으로 떠나면서 일종의 ‘유서’로서 이 책의 원고를 넘겼다고 한다.

‘루쉰’은 루쉰의 생애를 고루 다루지도 않고 루쉰의 작품을 모두 검토하지도 않는다. 뿐인가, “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라는 말이 곳곳에 튀어나와 독자의 기대를 배반한다. 이 책은 루쉰을 정리한 책이라기보다 루쉰과 겨루게 만드는 책이다. 희망에도 절망에도 취하지 않고, 미래를 보여주는 대신 피 흘리는 현재를 보여줌으로써 다음 걸음을 이끄는, 그런 세계의 무게가 이 책에는 있다.

그래도 젊은이들에겐 목표가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루쉰은 “첫째는 생존, 둘째는 충족, 셋째는 발전”이라고 답했다. “이 세 가지를 가로막는 자가 있다면 상대가 누구든 우리는 그에 반항하고 그를 박멸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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