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사회가 요구하는 창의성의 학문 통섭형 인재 양성
이제 학문 융합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

대학은 항상 변한다. 3학(三學: 문법, 논리, 수사학)과 4과(四科: 기하, 대수, 우주, 음악) 를 가르치면서부터 시작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학은 가르치는 내용과 방법을 달리하며 변해왔다. 이러한 변화가 미래에도 계속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인지가 더 발달하고 대학에 대한 사회의 수요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학문은 융합의 길을 재촉했다. 그리스 때 ‘시 짓기 기술’로부터 시작했던 학문연구가 쪼개고 또 쪼개지며 분화하다가 이제 다시 옛날로 회귀하며 학문간의 융합을 당연시 하게 되었다. 이를 복잡계 과학시대의 도래가 추동했다. 노벨상을 수상한 프리고진이 서울에 왔을 때 말하기를 “이제 우리 그만 쪼개자”고 했다.

이젠 융합의 시각으로 학문을 보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지게 된다. 대학의 학문체계는 그래서 바뀌어야 마땅하다. 그 중심에 인지과학이 있고, 인미(認美)과학이 있다.

이해의 틀은 그대로

인간이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눈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어떻게 보고 이해하고 설명하고 전달하느냐의 인식론(Epistemology)인데, 과거로부터 이해의 틀에는 (1) 기억의 축, (2) 이성의 축, (3) 상상의 축이 유지돼 왔다. 기억의 축의 대표적 학문이 역사이고, 이성의 축은 철학이고, 상상의 측은 시학(詩學)이다. 이들 중 상상의 축이 더 부각되게 된 것은 창조사회를 맞기 때문이다.

생산, 소비, 정보 등 여러 사회를 지나 21세기에 창조사회를 경험하면서 필수적이 된 것이 상상이다. 경험한 것만 가지고 지식을 만들어 내다가는 더 큰 부가가치를 생산해내지 못한다. 아인슈타인도 지식보다 상상이 더 큰 힘을 가진다고 했다. 그렇다고 다른 학문들, 이를 테면 역사와 철학 등 인문학의 중요성이 폄하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간의 관계를 한 차원 높이면 우리가 모르던 세계가 전개된다.  

패러다임 전환…대학 변화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한 동기는 패러다임이 변하기 때문이다. 19세기 과학주의와 도구적 합리주의에서 생각했던 그대로 세상은 커다란 기계이고 조직도 그러하며 인간은 그 가운데 한갓 부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시대와 인지가 깨인 지금의 세상은 너무나 다르다. 기계 같던 세상이 이젠 숨을 쉬게 되었다. 더 다양한 사고가 가능해졌고, 또 틀리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게 되었다. 조직을 지금은 콜라주(collage)라고 말한다. 다양하고 경계도 모호하고 고칠 수 있다는 추상미술의 기법에 빗댄 것이다.

패러다임은 분명히 둘이었던 것을 하나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서양의 이분법은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체와 부분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그게 아니고 부분이 곧 전체이고 부분 속에 더 큰 전체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차연(差延)’도 더 볼 줄 알아야 한다. 합리성이라는 것도 제한적 합리성 또는 휴리스틱스(heuristics)나 편견이 더 옳다고 믿기 시작했다. 행동경제학 쪽에서 주장하는 것인데, 저간엔 인간이 지극히 합리적 선택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성이 조랑말이라면 감성은 코끼리와 같아서 인간의 사고는 좁은 소견이나 감정이 더 지배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학문의 전당인 대학이 바뀔 수밖에 없는 사정이 분명해진 것이다.

융합의 추이는 거역 못해

대학에서 학문끼리 모여 협동하고 공동으로 운영하고 이젠 자유전공 학부제까지 등장했다. 대학에서 전공이 하나 이상인 것은 벌써부터 시작됐다. 도대체 한 가지만 알고 문제를 모두 다 풀 수 있다는 것은 연목구어다. 마치 플라톤의 동굴에 갇혀 벽화에 비친 희미한 자신의 모습이 전부인 양 알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제는 물리학도가 화학 구조식을 외우고 기계학도가 박테리아를 알지 못하면 안 된다고 한다. 안과 의사와 의공학도가 만나 인공안구를 만들어 낸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디자인 작업을 겸업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인간이 제 2 계몽시대, 네오 르네상스 시대를 맞으며 무수히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은 원래 융합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자체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 그리고 학문과 학문끼리 만나야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문제를 푸는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인문과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같은 학문 구분은 정말로 시대착오적이 됐다. 50년대부터 이과와 문과로 나누어 문과생에게는 대학 입학 때 수학I만 해도 된다는 교육정책이 지금껏 이어지고 있으니 지식인을 반쪽자리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사람은 누구나 형이상학부터 시작해서 철학과 수학을 두루 섭렵해야 자연학과 인성학에 익숙해져 인간과 사회를 제대로 이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0년대 중반부터 대학들은 ‘문리과 대학’이라는 편제를 버리고 인문, 자연, 사회로 나눴다. 정답이었던 대학의 학문체계를 허물었던 것이다. 미국은 하버드 같은 경우에 칼레지가 하나이다. 버지니아 대학에도 사회대학에 인문은 물론 아트까지 있다. 대학에 여러 학문이 칸을 막지 말고 함께 섞여 숨쉬고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21세기 학문체계

앞으로 대학의 학문체계가 바뀌어야 할 것은 당연하다. 분석과학과 경험과학의 분류나 경험과학 속에 기초과학과 응용과학의 구분이 있는 것은 존중하지만, 문제를 풀기 위해 여러 학문이 같이 달라붙어야 하기 때문이다. 70년대에 동경에서는 일찍이 학문을 인간, 생명, 정보, 우주 등으로 구분해야 한다고 했다.

과학기술이 과거와 다르게 폭발적으로 발달하면서 분과학문에 머물던 것이 이제는 융합학문으로 가고 미래 각광을 받는 학문이 달리 조명되기 시작했다. 우주과학과 생명과학, 그리고 뇌 과학 등이 그것인데, 이는 레이먼드 커즈와일이 ‘특이점이 온다’라는 책에서 과학의 변화를 예견해 더욱 분명해졌다.

이른바 물리학과 화학의 시대에서 시작한 과학이 생물학의 시대를 거쳐, 기술학과 더 밀접해지고 인간의 두뇌가 창발한 후 우주가 깨어나는 단계로 접어든다는 것을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1세기 학문체계를 보면 형이상학이 뿌리인 채, 줄기에는 자연학과 인성학(Ethology)이 자라잡고 기술과 사회의 관계가 보다 더 접목되면서, 왼쪽에는 기존의 분과학문이 나열되고 오른 쪽에는 새롭게 각광받는 학문 들, 이를테면 나노과학, 생명과학, 우주과학 등등이 나열된다. 이들이 만나는 꼭대기 접점에 융합과 통섭과학이 자리를 잡는다. ‘국가의 미래’나 ‘우리는 미래에 무슨 공부를 할 것인가’와 같은 책에 자세히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미래대학의 모습

그래서 이제 우리는 미래대학의 모습과 내용을 정립할 때가 되었다. 이순종 교수가 미래대학을 그린 것을 보면(‘우리는 미래에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 참조)교수, 연구, 실험 등이 기업과 커뮤니티와 다 연관되는 것을 상정한다. 거기에 더 주문을 한다면, 미래대학은 우주도시에 건립될 것이고 바다에 떠 있는 섬(부양도시)에도 캠퍼스가 있을 것이다.

캠퍼스의 위치는 그러한데 필자가 2006년에 한 번 그려 본 미래대학의 학문편제는 이러하다(위 <그림 1> 참조). 대학에 총장은 있어야 하고 기초교육의 장도 있어야 하기에 이들이 중심이 되고 6개의 대학이 병렬되는 형태를 구상했다.

(1) 인지과학대학, (2) 생명과학대학, (3) 인간정보생활과학대학, (4) 우주과학대학, (5) 융합공학대학, (6) 예술미학대학 등이 그것이다. 그 밖의 모든 과학은 응용과학으로 치부해 전문대학원의 수준으로 분류했다. 여기서 한 가지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대학의 학문 원소가 코그노(cogno), 바이오(bio), 인포(info), 나노(nano), 그리고 디지그노(designo)라는 것이다. 생소한 단어인 디지그노는 앞으로 미래학문이 관계학으로 발전해야 하기 때문에 여러 학문을 묶어 더 아름답게 꾸민다는 뜻을 함축한다.

앞으로 대학이 어떻게 될 것이냐, 교수방법은 또 어떻게 바뀔 것이냐 등에 관한 이야기가 본격화되고 있다.

엘리트 대학은 생존

대학이 살아 남을까? 유비쿼터스 시대가 도래하니까 캠퍼스가 있는 대학이 있을 필요가 있을까?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물리적 장소의 공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흐름의 공간이 더 중요하다고 하니까 고정된 공간의 중요성은 그 만큼 줄어 들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은 보통 대학들은 문을 닫을 것이라고 예견하는 사람이 있다.

교수 방법으로 보편화되어 가는 인터넷 강의며 화상 강의가 주류를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캠퍼스에 가지 않아도 강의는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어느 대학을 보면 중앙도서관 자료실에 이미 여러 강의의 동영상이 저장돼 학생들이 언제라도 강의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미국에서도 유수의 대학 강의가 공개되기 시작했다. 등록한 학생만이 아니라 일반인도 얼마든지 강좌를 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 상아탑이라는 폐쇄된 대학의 이미지가 크게 변하고 있는 것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 엘리트 대학은 남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유가 재미있다. 대학이라는 곳이 원래 지식을 습득하는 곳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오해이고 대학의 가치는 지식보다는 캠퍼스에서 만난 인간관계가 평생 영향을 미치니 이것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좀 실망스러운 이야기이긴 해도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한 입장일 뿐 앞으로 삶을 지배하는 것은 얼마나 창조적 상상력을 키우느냐 이고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이 대학에서 융합학문을 습득할 때 그 길이 열리기 때문에 캠퍼스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대학의 모습을 결코 쉽게 포폄하면 안 될 것이다. 어떤 형태이든 미래대학을 준비하기 위해 모두가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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