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당선된(울산 북구) 조승수 동문(북한학 박사과정) 인터뷰

울산 북구서 당선된 조승수 동문
국회의 296석 중 1석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어떤이는 고작 한 석에 불과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판단하기는 이르다. 진보적 가치로 정책과 의제를 선점해 한 석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해 보이겠다는 자신감을 내비치는 조승수 동문. 그가 말하는 정치에 대해 들어봤다.

지난 4ㆍ29 국회의원 재보선에서 조승수 동문은 울산북구에 출마, 한나라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조승수 동문은 “제 당선은 노동자와 서민들의 의지의 결과죠, 이번 당선은 사법살인에 대한 주민의 심판이라고 생각해요” 라고 말한다. 사실 그의 당선 소감이 이렇게 의미심장한 데는 이유가 있다. 조승수 동문은 17대 총선에서 이미 울산북구에 선출된 이력이 있는 재선의원이다.

‘진보정치 1번지’라 불리는 울산 북구에서 그는 일찍이 시민들의 선택을 받았었다. 하지만 사전 선거 운동 혐의라는 억울한 누명이 씌어졌고, 대법원의 판결로 그는 의원직을 상실하게 됐다.

그는 “제가 정치인으로서는 드물게 네이버 검색어 1위까지 해 봤어요”라고 말한다. “형평성에 어긋난 판결이라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재판부의 판결에 수용할 수밖에 없었어요”라며 아깝게 고배를 마셨던 경험을 토로한다. 조승수 동문은 억울했지만 그래도 좋은 경험이라 긍정적으로 여겼고, 결국 이번 당선까지 올 수 있었다.

뚝심 있고 꿋꿋한 조승수 동문의 학창시절은 어땠을까. 재학 당시의 꿈이 국회의원이었는지도 궁금했다.
조승수 동문은 “원래부터 꿈이 국회의원은 아니었어요”라며 “제가 대학 다닐 당시의 시대 상황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했고, 제도권 정치에 몸을 담으면서는 원내에 진출해야겠다는 사명감이 있었던 것이죠”라고 말한다.

조승수 동문의 대학 시절은 전두한 정권이 시작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조승수 동문은 어떻게 살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다 결국 ‘독재 타도’를 외치며 시위대열에 동참하게 됐다.

그는 “무엇이든 공개적으로는 할 수 없었던 시기였죠, 학교에서는 Under Circle이라고 해서 몰래 학생들끼리 공부하고 그랬어요”라며 어두웠지만 그래도 즐거웠던 때를 추억했다.

“82년도 2학기 때 였던가, 제가 교내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에게 붙잡혀 이름을 적힌 적이 있었거든요, 그 때 총장 직권 휴학이라는 것을 통해 제적당하니까 바로 영장이 나와 3일만에 입대하라고 그러더라고요” 이른바 악명높았던 ‘녹화사업’ 즉 강제징집이었다.

하지만 뚝심 있고 원칙주의자였던 그는 이에 승복하지 않았고 홀로 시위를 벌였다.

늘 교내에 대기 중인 경찰에게 가능하면 안 잡히고 오래 버티기 위해 학내의 분수대로 뛰어들기도 했다.
당시 학내에 있던 분수대의 중앙 부분에는 사람 한 명이 거뜬히 잠길 정도였다.

그는 앞 뒤 가리지 않고 일단 뛰어들었다. 물론 5분도 채 되지 않아 경찰에 연행됐다. 조 동문은 힘들었던 과거지만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으며 설명했다. 민주화운동의 경험이 국회의원당선에 초석이 됐던 소중한 기억임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그는 대중들에게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진보 정치를 하고 있다.

“진보 정치를 시작할 때는 젊다 못해 어렸던 시기”라며 “제가 처음으로 하는 역할이 많았어요”라고 말한다. 보편적 가치에 순응하지 않고 과감한 선택에 망설이지 않는 조승수 동문다운 행동이었다.

그는 앞으로 아주 첨예하게 대립하는 국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국회는 다양한 이해를 대변하는 사람들이 모여 대립하는 곳”이라며 “매일 몸싸움으로만 비춰져 그렇지 보다 제대로 싸워야 할 필요성이 있어요, 다만 내용으로서만 말이에요”라고 말한다.

대학시절도, 정치생활을 시작한 이후로도 모든 일이 순조롭지만은 않은 그다. 하지만 그는 언제든 중심 잡는 법을 잘 알고 있다. 조승수만의 가치를 대중에게 피력할, 앞으로 그의 당찬 정치 인생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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