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보드래(교양교육원) 교수

권보드래 교수
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사내가 있다. 운이 좋았다기보다 수완이 좋았던 사내. 그는 어디서나 거래를 텄고, 자기편을 만들었으며, 그러면서도 누구도 믿지 않았기에 살아남았다.

유대인 탄압이 극단으로 치닫던 2차 대전 막바지, 그는 배신당하고 밀고당한 끝에 아우슈비츠까지 밀려오지만, 빵과 소시지를 거래하는가 하면 어학과 목공과 무두질 등 온갖 능력을 익히고 동원해 살아남는 데 성공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러나 삶은 계속되고 악몽 또한 계속된다. 사업가로 성공한 후 미국에 정착했으나, 그는, 그리고 역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그의 아내는 평생토록 잠자리에서 비명을 질러댄다. 아우아우아우아우우.

전쟁 후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있다. 세상의 모든 부모란 그렇듯 꿈속에서 비명을 질러대는 것이려니 여겼던 아이. 그는 나이 든 아버지와 갈등하고, 아우슈비츠의 흔적과 미국의 풍요 사이에서 흔들리고 찢긴다.

지난 시대의 파괴와 야만을 대표하는 이름,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라면 마땅히 희생자로서의 숭고한 면모를 지녀야 하련만, 그의 아버지는 인색하고 고집스러우며 흑인만 보면 기겁하는 인종차별주의자이기마저 하다.

펴낸곳 : 아름 드리미디어
너무나 속물적인 아버지의 아우슈비츠라니, 이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혹은 아우슈비츠가 아버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아트 슈피겔만의 ‘쥐’는 아우슈비츠에 대한 기록이자 생존자인 아버지에 대한 기록이다. 어머니마저 자살한 후 불신과 고립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아버지. 성냥은 아깝지만 가스비는 집세에 포함돼 있다며 종일 가스불을 켜 놓는 아버지. 개봉한 씨리얼을 반품해 달라고 떼쓰면서 아우슈비츠를 들먹이는 아버지. 아버지를 통하면 아우슈비츠마저 그저 악다구니 생활의 현장처럼 들릴 때가 있다.

그 압도적인 야만 속에서도 아버지는 단 한순간도 삶을 포기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남들이 공포와 무력감에 기진맥진해 있을 때 아버지는 살아남기 위해 빵조각을 모으고 더 잘 살아남기 위해 무두질을 익힌다.

아버지의 생존욕망은 거의 무목적적이다. 아내가 남아 있긴 했으나, 아내가 없다고 이 질긴 사내가 삶을 포기했으리라고 믿기진 않는다. 그는 아우슈비츠 이전부터 그랬고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여전히 그랬다.

‘쥐’를 읽고 나서 아우슈비츠가 더 공포스럽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아우슈비츠가 때로 그 잡초 같은 사내마저 압도해 버렸기 때문이다. ‘쥐’를 읽고 나서 아버지에게 혐오와 경탄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목적 없으되 그토록 확고하고 강렬했던 그의 생존욕망 때문이다.

지금은 아우슈비츠의 시절이 아니지만, 사는 게 언제라고 특별히 쉬울 리 없다. 비교할 수 없는 저마다의 무게를 지고 헉헉거릴 때, 가끔은 생존의 욕망 자체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무조건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은 어떤 부도덕이나 불의와도 손잡을 수 있기에 자못 공포스러운 것이나, 한편 시절의 압력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그 기백은 유용할 것이다. “살아라!”라는 절대 명제를 어떻게 자기화할 것인지가 문제라고 미야자키 하야오도 말했거니와― 아 참, 그러고 보니 ‘쥐’도 만화다. 가끔 ‘그래픽 노블’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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