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지 건립주체에 관한 봉안기와 삼국유사의 서술 서로 달라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 선화공주와 백제 무왕의 사랑 이야기가 미륵사 사리 봉안기의 발견으로 학계의 논란의 중심에 떠오르고 있다.

우리대학 김상현(사학과) 교수는 지난 14일 서강대 다산관에서 열린 '익산 미륵사지와 백제 불교' 월례 학술 세미나에서 “이제 사리봉안기가 발견돼 사실관계가 분명해진 이상 억지로 선화공주를 미륵사지와 연관시켜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김상현 교수는 "미륵사가 창건 당시 삼원 체제를 염두에 두고 디자인되었으며, 봉안기 자체에서도 왕비 사택씨가 서탑 외에도 ‘가람’을 발원해 창건한 것으로 나오므로 선화공주가 미륵사 창건과 관련됐다는 말엔 근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미륵사지서 출토된 금제 사리봉안기, 선화 공주가 아닌 사택씨가 미륵사지를 지었다는 내용이다.
적어도 미륵사지와 선화공주를 억지로 연결시켜선 안된다는 주장이다. 김 교수는 또 “639년(무왕 40) 당시 사리를 봉안했던 사람들이 기록한 사리봉안기와 13세기 일연에 의해 편찬된 ‘삼국유사’의 사료적 가치를 따지면, 사리봉안기의 기록을 따라야 하는 게 당연하다”며 사리 봉안기 쪽 역사적 중요성에 무게를 두었다.

하지만 이날 함께 발표에 나선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조경철 박사의 의견은 달랐다. 그는 “3탑 3금당으로 이뤄진 국내 유일의 3원(院) 병립 가람인 미륵사가 적어도 10여 년의 시차를 두고 각기 다른 사람에 의해 창건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조 박사는 또 “과거 미륵사지의 세 개의 탑 중 동원(東園)은 사택왕후가 건립하고 지금은 소실되고 없는 중원(中園)은 선화공주가 건립했을 수도 있다“며 미륵사와 선화공주의 관계에 대해 결론을 내리는 것은 성급하다고 주장했다.

유물이 출토된 미륵사지 석탑 사진
이처럼 논란이 불거지게 된 것은 문화재청이 2002년부터 실시해온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과정에서 지난 1월 석탑의 1층 심주 상면 중앙의 사리공으로부터 505점에 달하는 유물들이 발굴됐기 때문이다. 발굴과정에서 석탑의 금제 사리 봉안기(위 사진)가 발견됐는데, 여기에는 탑을 조성한 주체와 배경들에 대해 지금까지의 미륵사지에 대한 통념을 완벽히 깨버리는내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사리가 나왔던 미륵사지 석탑은 백제 무왕 68년에 지어진 거대한 석탑으로 학계에선 삼국유사의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설화를 받아들여 이 탑을 무왕의 부인인 선화공주가 건립한 것으로 이해해 왔다.

하지만 이번에 미륵사지 석탑에서 출토된 봉안기에선 탑을 지은 주체를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 왕후,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 유사와 봉안기의 기록이 일치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사리봉안기의 발견을 둘러싼 논란은 서강대 학술세미나 뿐이 아니었다.

지난 21일 국민대 세미나실에서 있었던 ‘익산 미륵사지 출토 유물에 대한 종합적 검토’라는 주제의 세미나가 열렸다.

사택씨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는 이용현 연구관
이용현 국립 부여박물관 학예연구관은 “미륵사탑 건립과 사택씨”란 논문에서 사씨 가문이 무왕 시기의 유력한 가문이었으며 무왕의 왕권과 정치적 기반을 지원해준 가문이었다고 밝혔다. 말미에 이 교수는 “삼국유사와 봉안기의 내용을 비교할 때 선화공주의 신라를 백제 유력 가문의 백제로 바꾸면 여러 가지가 들어맞는다”며 묘한 여운을 남기기도 했다.

현재까지의 논란을 뒤돌아보면 삼국유사에 기록된 선화공주의 이야기가 적어도 사리봉안기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과연 삼국유사의 기록을 전면적으로 부인할 정도의 것인지에 대해선 아직 전문연구가 더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선화공주 이야기 뿐만 아니라 봉안기의 내용에 대한 당시 무왕의 가계나 왕권과 귀족과의 역학 관계, 정치와 밀접한 불교, 등 백제연구 전반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직 백제사 연구는 유물이나 사료부족으로 인해 미진한 것이 사실이다. 이번 미륵사 사리봉안기 발견으로 백제사 연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사라진 제국 백제에 대한 베일이 걷혀지기를 기대해 본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