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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을 극복하는 책읽기 ‘<2>희망의 원리’권보드래(교양교육원) 교수 서평칼럼
  • 권보드래 교수
  • 승인 2009.03.08
  • 호수 1471
  • 댓글 0
   
  권보드래 교수  
 

가끔 제목만으로 위안이 되는 책이 있다. ‘희망의 원리’도 그런 책 중 하나다. 희망이라니, 게다가 그 원리라니―혹은 희망이 원리라니. 오래 전 한 권짜리로 나온 ‘희망의 원리’를 사서 책꽂이에 꽂아둔 것은 순전히 제목 때문이다. 루카치와의 유명한 논쟁 때문에 블로흐의 이름이야 알고 있었지만, 책을 살 만큼 호감이 깊었던 건 아니니까.

책을 꽂아두고 보니 그 한 권짜리 ‘희망의 원리’는 총 5권으로 구성된 본책의 제 4권 ‘자유와 질서’편만을 번역한 소산이며, 역자가 전책 번역을 하고 있지만 어디 출판되기가 쉽겠냐는 등의 풍문도 듣게 되었다.

마음에 드는, 그러나 선뜻 입을 용기가 나지 않는 옷을 사서 걸어두고는 때때로 그 옷을 보는 것만으로 즐거워하는 것처럼, 오랫동안 책꽂이를 훑을 때마다 ‘희망의 원리’를 발견하곤 흐뭇해하곤 했다. 희망의 원리라, 에른스트 블로흐라. 언젠가 만나야지. 도망가면 안 돼, 거기 꼭 붙어 있어.

몇 년이 지나서야 한 권짜리 ‘희망의 원리’를 읽었다.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을 개관하되 ‘자유’의 경향과 ‘질서’의 경향을 짚어낸 책이었는데, 뜻밖에 책은 구미에 썩 맞진 않았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자유’의 유토피아로 그려내고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를 ‘질서’의 유토피아로 평가한 대목이 특히 거슬렸다. ‘유토피아’를 읽다가 모두 똑같은 옷을 입는다는 그 획일성에 질리고 ‘태양의 나라’를 읽으며 남녀 모두 나체인 채 짝짓기 상대를 살핀다는 발상에 깔깔댈 무렵이어서였나 보다.

   
     
여가마저 진지하게 즐기는 것 같아서 ‘유토피아’는 어째 무서웠고, 적도 부근의 풍요로운 자연 속에 자리잡은 ‘태양의 나라’에서라면 천근만근 노동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아 괜히 마음이 쏠렸다. 가톨릭을 수호하면서 왕권에 맞서다 처형당한 토마스 모어는 ‘자유’고, 몇 번이나 종교재판정에 서고 혹독한 고문을 견뎌낸 캄파넬라는 ‘질서’라 이거지― 마음속으로 인신공격성 댓글을 휘갈기면서 툴툴대기도 했다. 유대인이란, 이렇게 작게 중얼거렸는지도 모르겠다. 맙소사.

그리고 2004년, ‘희망의 원리’ 완역이 출간되었다는 ‘사건’을 접했다. ‘감동 먹었다’. 역자 박설호 선생의 이름을 꼭꼭 기억해 두고, 조만간 사 두리라 다짐했다. 블로흐의 독일어 문장이 너무도 압축적인 까닭에 번역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소문을 들은 터라 ‘사건’은 더 인상적이었다. 제 4권 ‘자유와 질서’편을 심드렁하게 읽어낸 후였지만 ‘희망의 원리’라는 제목이 주는 생생한 매력도 바래지 않았다.

공공연한 맑스주의자였으나 결국 서독으로 망명한 그 생애도 더 문제적으로 보였다. 다섯 권, 3천여 페이지로 번역된 ‘희망의 원리’는 그야말로 문화의 전 영역을 섭렵하면서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을 읽어내고 옹호한다. 10대 때 공상에는 물론이고 ‘음식이 솟는 탁자’며 ‘알라딘의 마술램프’에도 꿈은 깃들어 있다. 날씬한 몸매에 대한 환상과 쇼윈도에의 도취, 가면을 썼을 때의 쾌감과 근질근질하는 충동, 연애에의 열정과 결혼 후의 환멸에도 위태로운 대로 꿈은 출렁이고 있다.

블로흐는 싸구려에 뒤죽박죽인 채로나마 우리의 공상과 환각과 도취가 모두 꿈꾸는 행위임을 보여준다. “꿈과 삶 사이의 간극은 해롭지 않다.” 꿈을 계속 삶 속에 당겨쓰는 한, 살고 살리기 위해서 꿈을 쓰는 한.  ‘희망의 원리’는 인류라는 큰 단위를 전제하지만, 힘든 시절, 책을 내 멋대로 이용해 본들 어떠리. 이 글을 보내고 나서야말로 ‘희망의 원리’ 전권을 사러 서점에 가야겠다. 묵직한 무게를 느끼며 책을 들고 돌아와, 꽂아둔 채로 또 몇 년을 즐거워하리라. ‘희망의 원리’란 그 제목만으로 황홀한 책이니.

권보드래 교수  dgupress@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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