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식 교수

 

식욕을 관장하는 뇌 부위가 훼손되면 인간은 음식을 옆에 놓고도 식욕이 느껴지지 않아 굶어 죽는다.  우리는 고맙게도 욕망을 타고나서 지금까지 생존해 온 것이니 욕망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수십만 년 동안 수렵 채취 생활을 하며 진화해온 우리에겐 많은 욕망이 새겨져 있다. 대표적인 욕망이 식욕 성욕이지만 인간은 복잡하고 미묘한 동물이라 여러 가지 본능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욕망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 고마운 일도 하지만 때로는 욕망 때문에 일을 그르치기도 하고 우리 스스로 손해를 보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많은 고통은 욕망으로부터 일어난다.


불교는 고통의 해결을 위한 종교라고 말할 정도로 깨달음은 고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많은 사람이 불교를 허무주의적 종교, 소극적 종교, 수동적 종교로 오해하고 있다. 불교 신도마저 주어진 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운명론자가 된다. 오늘날 사찰에 가면 20대 젊은이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노인 여성의 종교가 되어 버린 한국불교는 서양 불교와 너무나 대조적이다. 전 연령대의 지식인, 고학력자가 주축이 된 서양 불교는 수행과 교리 공부 중심이지만 한국불교는 기도와 제사 중심이다. 한국불교에는 합리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진 20대가 들어갈 공간이 없다. 간화선이 아무리 고급 수행이라고 주장해도 한국불교에서만 볼 수 있는 수행 방법이며 얼마나 세계가 이를 받아들일지는 의문이다.


부처님의 육성이 생생하게 새겨진 초기 불교 경전을 보면 한국불교가 부처님 말씀으로부터 얼마나 이탈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오랜 역사와 아픈 경험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온 한국불교를 부정하는 것 또한 불교적인 대응법은 아니다. 불교의 지혜를 현대화하여 부처님에게 돌아가는 운동이 한국불교와 공존해야 한다.


불교는 계급제를 부인하고 여성의 출가를 허용했던 혁신적 불교였으며 이자를 허용하고 상업, 수공업, 금융업, 부동산업을 장려했던 친시장, 친자본적인 불교였으며 도시 속에서 사람의 고통을 해결해주던 도시불교였다. 돈을 멀리하고 자신의 현재를 운명으로 체념하며 수동적 소극적 허무주의적으로 사는 게 불교가 아니다. 불교의 지혜는 세상을 비출 수 있어야 한다.  세상과 떠난 불교는 부처님의 뜻이 아니다. 이제 다시 부처에게 돌아가 불교의 지혜로 취업의 문제, 돈의 문제, 가난의 문제 등 삶의 고민 하나하나를 해결해가야 한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