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영섭 불교학과 교수.

 

경전은 진리를 알리는 이정표다. 모든 것은 변한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진리기 때문이다. 진리는 변하는 것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다. 원인과 조건에 의해 형성된 것은 모두 변한다. 이 때문에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물질은 무상하다. 느낌은 무상하다. 지각은 무상하다. 형성은 무상하다. 의식은 무상하다. 그러므로 물질에는 자아가 없다. 느낌에는 자아가 없다. 지각에는 자아가 없다. 형성에는 자아가 없다. 의식에는 자아가 없다. 모든 지어진 것은 무상하고 일체의 것에는 자아가 없다.” 붓다는 이와 같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이와 같이 제자들에게 전해진다고 설한다.
나는 매주 저녁 만해관 321호 연구실에서 학부생 및 대학원생과 우리말로 옮긴 붓다의 ‘상윳타 니까야’를 합송하고 윤설한다. 저마다의 목소리로 읽고 저마다의 생각을 들어본다. 이 향기는 우리 주위를 맑고 깨끗하게 만든다. 우리는 이 청정한 향기와 믿음으로 일주일을 살아간다. ‘천수경’에 “도량이 맑고 깨끗해 흠과 때가 없는 곳에는 삼보와 천룡이 내려와 장애를 막아준다”는 말씀이 있다. 나와 내 주위가 깨끗하면 삼보와 지킴이들이 보우한다는 것이다. 붓다의 경설이 끝나면 우리는 한국의 경전인 ‘삼국유사’를 합송하고 해석하고 토론한다.
고려의 일연선사가 찬술한 이 저술은 우리 민족의 수다라이자 바이블이다. 여기에는 한국인의 유전인자가 들어있다. 천신-산신-무속신앙을 풍류도의 큰 가슴으로 껴안은 불교가 우리 사상의 본류가 되어 다시 도교-유교-기독교의 지류에 흘러내려 주고 있다. 펄펄 살아 뛰는 인간, 적나라한 인간, 위선과 가식의 인간을 일깨우는 페이소스가 있다. 우리는 한민족의 경전을 읽고 일주일을 맑고 깨끗한 향기로 살아간다. 동이족은 산동반도에서 만든 ‘은자’(殷字) 즉 ‘한자’를 창안하였다. 우리는 이 ‘은자’로 된 경문을 읽고 우리말로 옮겨간다. 이 때 우리는 한국말은 ‘은자’ 즉 ‘한자’의 발음기호임을 거듭 확인한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온몸을 바깥에 빼앗기며 산다. 눈 귀 코 혀 몸의 다섯 감각기관이 형색 소리 향기 맛 촉감에 휘둘리며 산다. 내 생각이 다섯 감각을 제어하고 다섯 대상에 붙들리지 않으려면 내면의 충전이 필요하다. 일주일 내내 우리의 감각을 방전하면 기가 다하고 맥이 다하게 된다. 저마다 스마트폰에 오감을 빼앗기면 스마트폰도 우리도 모두 방전되고 만다. 경전은 마음의 배터리이다. 불경은 정신의 배터리이다. ‘삼국유사’는 한민족 문화의 배터리이다. 매일 매일 스마트폰의 배터리를 충전하듯이 우리의 마음과 정신의 배터리도 충전해야 한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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