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원철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흔히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한다.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어리석음을 떨치고 진상을 깨쳐 성불하기 위해 스스로 수행하는 것이 불교의 핵심이라는 의미이다. 부처 즉 ‘깨달은 이’가 되는 게 목표인 불교를 일컬어 깨달음의 종교라 하는 셈이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불교를 충분히 규정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우선 부처님과 보살 들의 가피(加被)를 믿고 이를 기구하는 것이 불교신행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가피란 불보살이 자비를 베풀어 중생의 기도나 서원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불자들이 불상이나 불탑에 예배하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해탈의 길을 몸소 보여준 위대한 스승인 부처님께 예경을 올리는 의미라고 풀이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이들의 가피를 기대하면서 소원성취를 비는 기도 행위인 경우가 많다. 그런 쪽의 불교신행은 세속적인 일에 휘둘리지 않고 초연하게 깨달음을 위한 구도에 전념하는 수행의 모습과는 아귀가 안 맞게 보일 수 있다.

그 둘을 구별해서 흔히 자력신앙과 타력신앙이라고 일컫는다. 자신의 구도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는 데 전념하는 것이 자력신앙, 불보살의 가피를 구하는 것이 타력신앙이다. 동북아 대승불교에서는 선종이 가장 자력신앙을 강조한다. 한편 타력신앙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아미타불의 극락정토 신앙을 꼽는다. 타력신앙은 근기가 낮은 이들을 자력신앙으로 이끌기 위한 방편의 길로 여기는 정서가 다소간 선불교에 깔려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오로지 참선에 전력을 쏟아 화두를 타파하고 돈오하는 데에만 선수행자들의 관심이 쏠리는 것을 볼 때면 이런 의문이 든다. 그렇게 하여 깨달음을 이룸으로써 되려는 부처님은 과연 어떤 부처님인가?

아미타불 같은 부처님이 되고자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대승불교 보살도 수행의 최적의 롤모델이 아미타불이기 때문이다. 아미타불은 원래 어느 나라의 왕이었다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감화되어 출가하여 수행의 길에 나섰다. 마흔 여덟 가지 서원을 세웠고 수행을 통해 이를 완벽히 이루었다. 그 서원들은 온통 중생들을 위한 절절한 자비심의 표출이다. 그 중 한 가지가 정토로서, 자신의 가피력으로 모든 중생이 구제되도록 하겠다는 기획이다.

화두를 타파하고 돈오함으로써 이루려는 부처님이 그쯤 되는 부처님이어야 간화선도 대승불교 보살도의 반열에 들 수 있지, 아니면 혼자 깨치는 데 그친다는 소승에 머물고 만다. 예로부터 선수행과 정토신앙을 함께 닦으라고 가르친 선사(禪師)들도 많았던 이유가 납득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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