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에서 꽃피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 (출처: 네이버 영화)

생명력이 움트는 사월의 봄이다. 푸른 봄빛이 귀밑머리를 간질일 때면 저마다 간직해 온 사랑이라는 감정이 불쑥불쑥 솟아나기 마련이다. 소박하게 흐드러진 동악의 풀꽃들은 캠퍼스를 거니는 청춘들의 작은 설렘을 부추기는 듯하다. 한편, 우리는 이처럼 봄을 맴도는 분홍빛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의 올바른 방향을 잡을 필요를 잃지 않아야 한다. 푸른 봄날 청춘이 청춘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
우리가 계절이라면,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주인공들은 꼭 겨울을 닮았다. 가난한 유년의 아픔과 동생의 죽음을 안고 살아가는 윤수, 빼앗긴 순결과 어머니의 배신을 감내해야 했던 유정. 두 주인공의 삶은 겨울나무와 같았다. 그들이 이고 살아가는 과거의 아픈 기억은 칼바람이 돼 삶을 뿌리째 흔들고 앙상한 그루터기만 남겨 놓았다. 의도치 않게 휘말린 범행으로 윤수는 사형수가 돼 죽을 날만을 기다리게 되고, 상처투성이 삶을 끊어내기 위해 유정은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한다. 가난한 윤수와 부유한 유정, 서로의 상반된 삶의 과정은 죽음을 갈망하는 암울한 상황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의 아름다운 부분만 마주하기를 기대한다. 이러한 생각은 연인들로 하여금 낭만을 사랑의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게 한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두 사람은 각자의 가장 불행했던 삶의 궤적을 공유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피워낼 수 있었다.
본 영화는 사랑을 나누는 청춘들에게 사랑이란 무엇인지 그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어쩌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아름다움에 끌려 그 아름다움만을 갈망하고 있는지 모른다. 연인의 아픈 기억을, 눈물을, 그 사람의 여타 아름다운 모습으로 애써 덮어보려 하진 않았던가? 그러나 사랑 또한 본원적으로 ‘두 사람’ 사이의 관계이므로 우리는 이따금씩 상대의 어두운 부분을 마주해야할 수 있다. 다소 머뭇거려질 수 있겠으나, 가을 열매처럼 탐스럽고 성숙한 관계는 우리가 상대의 정서적 상흔을 직시하고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봉오리진다.
고통은 우리가 인간임으로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삶의 단면이므로, 누군가의 아픔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상대의 삶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우리는 종종 낭만을 사랑의 이데아로 상정하고 그것을 좇으려 하기 때문에 현실에 상존하는 고통과 절망을 외면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러나 니체가 강조했듯, 우리는 저 먼 곳의 이데아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우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긍정해야 한다. 그의 영원회귀 사상은 삶의 모든 순간이 회귀하기를 바랄만큼 우리의 삶 자체를 사랑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가 내비치는 어두운 순간이 영원히 회귀해도 좋을 만큼 그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계절이 돌고 돌아 봄에 이르렀지만 시간은 또 다시 소슬바람 부는 겨울의 언저리로 우리를 데려갈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도 살을 에는 겨울이 찾아올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 계절마저도 사랑해야 한다.
이 영화를 보고 다시 현재의 계절을 돌아보노라면 더 이상 봄이 마냥 화양연화일 수만은 없다. 한 포기의 꽃망울을 터뜨리기 위해 잎이 떨어져 나간 자리의 상흔을 봄바람은 얼마나 보듬고 사랑했을지,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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