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10월 초 폼페오 국무장관의 방북 결과는 풍계리 핵실험장에 사찰단이 방문하는 것 말고는 새로운 성과가 없다. 한국 정부는 미국과의 공조가 잘 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승인(approval) 없이는 한국이 5.24 조치를 해제할 수 없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참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외교적 수사다.

외교적 수사는 국제관계의 특수성에서 출발한다. 국가 간의 관계는 자칫 상황이 악화될 경우 상당한 손실이 따를 수 있다. 그렇기에 조심스러운 표현이나 모호한 용어를 선택한다. 그래서 ‘협의를 했다’고 발표하면 ‘합의가 없었다’는 의미가 될 수 있고, ‘유익한 회의’였다고 발표되면 ‘성과가 없었다’고 해석될 수 있다.

북핵을 둘러싼 표현도 마찬가지다. 완전한 비핵화나 종전선언과 같이 무언가 진전이 있는 것 같은 표현이 등장했지만, 결국 합의된 내용을 봐야 진실을 알 수 있다. 이때 합의된 내용이란 공식 석상에서 책임 있는 당국자가 밝힌 ‘말’과, 합의 문서로서의 ‘글’이다.
현재 북미 간에 합의된 내용은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 발표된 ‘완전한 비핵화’라는 모호한 표현과, 폼페오 국무장관이 지난주 방북 직후 발표한 ‘실무급 회담을 통한 2차 북미 정상회담과 풍계리 핵실험장 사찰단 방문 논의’가 전부다.

정확한 상황 판단을 위해서는 당사자들의 구조적 이익을 보아야 한다. 그래야 대화의 속모습을 볼 수 있다. 먼저 미국은 북한의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을 모두 제거하고 싶어 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과의 동맹을 유지하고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한다.

하지만 제대로 된 비핵화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검증을 강조한다. 반면 북한은 안보우려와 경제우려를 해소하려 한다. 하지만 혹시라도 기회가 있다면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이 더 좋은 상황일 것이기에 철저한 검증은 피하려 한다.

결국 미국과 북한은 검증 문제에서 견해차를 보이고 있다. 그 결과 북핵 검증을 위한 핵 목록 신고를 둘러싼 갈등은 어찌 보면 예견된 일이다. 다만 협상이 결렬되는 것이 양측에 모두 부담이 되기에 외교적 수사를 동원해서 잘 진행되는 것과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다양한 외교적 수사들이 등장할 것이다. 하지만 정확한 판단을 위해서는 겉이 아닌 속을 봐야 한다. 그 안에 있는 각 당사자의 이익과 전략의 요체를 파악해야 한다. 외교를 읽는 날카로운 눈이 대학생 시절부터 키워진다면 우리나라에는 축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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