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에 대하여’를 통해 바라본 여성을 옥죄는 모성애 프레임

▲영화 '케빈에 대하여' (2011).

‘아이를 봐도 모성애가 안 느껴져요. 제가 비정상인 걸까요?’

엄마가 된 많은 여성들은 육아고민을 나누는 ‘맘 카페’에서 모성애가 느껴지지 않는다며 고민을 토로한다. 하지만 미디어 매체들은 ‘임신·출산은 숭고하고 어머니는 위대하며 모성애는 여성의 본능’이라고 말한다. 마치 우는 아기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여성도 자신의 아이만은 끝없는 사랑과 헌신으로 대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모성신화는 훌륭한 어머니상을 예찬하는 동시에 이러한 어머니상에서 벗어난 여성을 ‘나쁜 엄마’로 치부하는 토대가 된다.

이러한 내용을 다룬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모성애 통념과 현실의 괴리 속에 방황하는 여성의 모습을 그린다. 여행가로 살며 자유를 누리던 주인공 에바는 여행지에서 뜻밖의 임신을 하게 된다. 에바는 가정을 꾸리고 출산을 기다리면서도 이전의 자유로운 삶을 잃었다는 것에 우울해한다. 이러한 모습은 사회에서 기대하는 좋은 어머니의 모습과 거리가 있다. 그러나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삶에서 앗아가는 것들을 떠올려보면 에바의 반응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출산 이후 에바는 자신을 적대시하는 아들 케빈 때문에 더 큰 고난을 마주하게 된다. 케빈은 동물을 죽이거나 동생의 눈을 실명하게 하는 등 잔혹성을 끊임없이 드러낸다. 아이답지 않게 영악한 케빈의 모습에 이상을 감지한 에바는 남편 프랭클린과 수차례 문제를 상의하려 한다. 하지만 프랭클린은 남자아이의 짓궂은 장난이라며 도외시하거나 에바를 되레 이상한 엄마로 취급한다. 이처럼 자녀를 두고 부정적인 생각을 내비치는 것은 모성에 대한 의심을 부른다. 프랭클린이 그러했듯 ‘엄마 맞아?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거야?’라는 물음이 뒤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남편의 방관은 에바와 케빈의 요원한 관계를 악화시켰고 청소년이 된 케빈은 대량살인을 저지른다. 그로부터 2년이 흐른 뒤에야 에바는 처음으로 케빈에게 살인을 왜 저질렀는지 묻게 된다. 마지막에 케빈을 안아주는 장면은 케빈을 이해하며 모성애를 느끼기 시작한 에바의 모습을 보여준다.

에바가 케빈을 이해하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던 것처럼 모성애는 후천적으로 학습된다. 그렇기에 거창하거나 신성시돼야 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바르일란 대학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지 않은 아빠도 육아의 경험을 통해 엄마와 동일한 모성애를 기를 수 있다. 즉 사회가 모성애라고 규정하는 것은 여성과 남성 모두 경험을 통해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모성애가 여성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팽배하다. 모성신화는 맞벌이 사회에서도 ‘그래도 애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풍조를 조장해 여성에게 육아부담을 떠넘긴다. 결국 여성들은 일과 육아를 모두 완벽하게 수행하는 ‘슈퍼우먼’이 돼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이러한 사회적 기대와 현실의 간극에서 여성들의 죄책감이 파생된다. 모성신화가 좋은 엄마와 나쁜 엄마를 구별하는 코르셋으로 돌아와 여성들을 억압하는 것이다. 육아와 일 중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면 비난을 가하는 가혹한 잣대는 전적으로 여성에게 향해있다.

그동안 모성신화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지탱하면서 육아 관계에서 대등해야 할 부성의 책임을 외면해 온 것이 아닌지 검토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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