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나 영화영상학과 교수

남산공원 한 귀퉁이를 차지한 동국마당 가을산책은 설렘을 준다. 고양이 가피의 집사로 살아가는 나는 동국마당을 산책하며 길냥이들을 운 좋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길냥이 밥을 챙겨 넣고 나가기도 한다. 어떤 길냥이들은 일단 인간을 피하기도한다. 그러나 조심스레 몸을 낮추고 나름 터득한 냥이식 인사를 건네면 멈칫 그 자리에 머물며 재롱을 피우는 냥이들도 있다.


그러면서 학생들이 길냥이들에게 붙여준 이름도 하나씩 배우게 됐다. 이를테면 정각원 뒷마당에서 마주치는 ‘턱시도’와 ‘노랑둥이’가 그렇다. 학림관과 박물관 사이 작은 숲에서 만나는 ‘노랑돼지냥’도 있다. 가을 학기 초, 학술관 들어오는 길에서 검은 점을 가진 하얀 아기 냥이도 처음으로 만났다. 출근길에 그 애를 만나면 상쾌한 하루란 느낌이 온몸에 전해온다. 인사동 뒷골목에서 밥을 주던 냥이맘을 우연히 만나 냥이들 에피소드를 듣느라 저녁 식사 약속에 늦은 적도 있다. 이런 내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면, 좋아하는 코드가 통하는 이들과 소통은 고달픈 인생길을 격려하는 에너지원이자 소중한 인연이다. 


고양이는 관찰할수록 매우 독립적이며 자유롭게 움직이는 매력적인 생명체이다. 사지를 쭉쭉 뻗으며 기지개를 편 후, 머리 윗 부위만 빼고 온몸을 구부리고 펴면서 자신의 까끌까끌한 혀로 닦아내는 모습은 구경하기만 해도 흥미롭다. 요가 할 때 배운 ‘고양이 자세’도 이런 움직임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나온 것이다. 양쪽 무릎을 꿇고 팔  다리를 어깨너비만큼 벌린다. 고개를 뒤로 젖히며 척추를 올렸다 내리며 고양이 기지개를 흉내 내본다. 책상 위 작업으로 굽은 등이 일상화된 현대인들에게 이런 자세는 척추와 등 근육을 풀어주면서 유연성을 높여준다. 심지어 스트레스도 풀어주면서.


인간보다 이렇게 자유롭게 움직이는 고양이과 퓨마 뽀롱이가 동물원에서 탈출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도 시민안전을 위해 뽀롱이를 사살한 상황은 우리를 반성하게 만드는 사태로 확장되고 있다. 사육사의 실수로 열린 문이 그에게는 자유를 향한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을 텐데. 자유를 위해 혁명과 혁신을 해온 영장류 인류사에 속한 인간은 왜 자유롭게 살고픈 동물을 가둬놓고 구경하는 동물원 영업을 하는 것일까? 움직이기에 붙여진 생명체인 동물이 동물원을 탈출하는 일은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2004년 서울대공원에선 늑대가, 2005년 서울 어린이대공원에선 코끼리 6마리가 탈출했다가 포획돼 다시 갇혀 구경거리가 되었다. 외국 동물원에서도 다양한 동물들의 탈출사태가 발생하면서 동물원 폐쇄 운동을 벌이는 동물복지 중심 세계연대 운동도 진행중이다. 유럽에선 한 세기 넘게 동물복지법 확대 논의가 진행  중이다. 인간이 동물 서식지에 찾아가 생태계를 공부하는 방향으로 전환한 호주의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세계와 연대하는 네티즌들의 청원이 생태계 보호와 생명체 공존의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중이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동물원 폐지해주세요’라고 올린 중3 학생은 옛날엔 동물원 가기를 좋아했지만 이젠 휴대폰으로만 본다는 해결안도 제시하고 있다. “8년간 좁은 우리에 갇혀 살다 4시간 30분 뛰어다녔으니 뽀롱이가 오히려 행복했을 수도 있겠다”라는 한 네티즌의 애도에 나 또한 공감한다. 이 사태를 계기로 동물복지에 관한 시민의식의 진화를 기대하며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란 소설에 나오는 인간 관찰담을 떠올려본다. “우리 고양이 족은 일상생활 자체가 거짓 없는 일기이니 세상에는 나쁜 짓을 하면서 자기는 끝내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자기한테 죄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니 순진하여 좋기는 하나, 남에게 폐를 끼친 사실은 아무리 순진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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