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각지에서 발견한 애니메이션 문화의 성공 비결

▲도쿄 치요다구의 아키하바라 거리

직장인들로 붐비는 출퇴근길, 지하철역의 옥외 광고에는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져 있다. 편의점 가판대에는 만화 잡지들이 진열돼 있고, 그 앞에 선 채 만화를 읽는 직장인들이 눈에 띈다. 일본 현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만화가 일상생활의 한 부분인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만화는 어떻게 사람들의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을까? 단지 ‘애니메이션 산업이 선진화됐다’는 결론만으로 납득되지 않는다. 이번 호에서는 흔히 ‘오타쿠 문화’로 불리는 일본의 애니메이션 문화와 이를 향유하는 방식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오타쿠라고 놀리지 말아요

오타쿠(お宅)는 본래 일본어로 ‘당신’ 혹은 ‘댁’을 지칭하는 인칭대명사다. 이는 80년대 들어 한 수필가의 칼럼에서 만화광을 가리키는 새로운 의미로 변형됐다. 국내에는 2000년대 전후로 애니메이션 문화가 보급되면서 ‘오타쿠’라는 단어도 함께 들어오게 됐다. 처음에는 단순히 일본 애니메이션에 심취한 사람을 뜻했지만, 시간이 흘러 특정 분야의 마니아를 가리키는 단어로 의미가 넓어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애니메이션 오타쿠라고 하면 색안경부터 끼고 바라보는 사람이 많다. 현재 일본에서 거주 중인 애니메이션 매니아 김진경 씨는 “한국에서는 사회에서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고 하면 이상하게 본다”고 밝혔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을 조롱하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안여돼’, ‘파오후 쿰척쿰척’ 등이 대표적이다. ‘안여돼’는 오타쿠의 전형적인 생김새를 ‘안경 여드름 돼지’라고 비하한 표현이다. ‘파오후 쿰척쿰척’ 역시 뚱뚱한 오타쿠가 먹으면서 내는 숨소리를 희화화했다.

이렇다 보니 우리나라에서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말하기 어렵다. 때문에 ‘일코(일반인 코스프레)’를 하거나, ‘숨덕(숨은 덕후)’이 돼 애니메이션과 관련된 취미를 숨기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대학생이자 애니메이션 마니아인 문 씨는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고 하면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으로 보기 때문에, 어디 가서 당당히 말하지도 못한다”며 “따라서 현재 학교에서는 ‘일코’를 하는 중이다”라고 고충을 토로했다.

반면 일본은 우리나라에 비해 애니메이션 매니아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퍼져 있다. 김진경 씨 역시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오타쿠 문화에 대해 개방적이다”라고 밝혔다. 이러한 인식이 바탕이 된 것일까. 현지에서 직접 보고 느낀 일본의 애니메이션 문화는 그 규모가 훨씬 크고 방대했다.

 

집 밖으로 나온 오타쿠

도쿄 치요다구의 한 번화가. 북적대는 인파들 틈에서 캐릭터 복장을 한 사람들이 전단을 돌린다. 직장인, 학생, 관광객들이 섞인 행렬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샌가 거리에서 애니메이션 주제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달라진 공기를 눈치 채고 고개를 들어보니 주변 건물에는 캐릭터가 커다랗게 그려진 옥외 광고물들이 붙어 있다.

‘오덕의 성지’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바로 아키하바라 거리다. 아키하바라는 한때 국내의 용산처럼 전자상가였으나 90년대 후반 오타쿠 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아키하바라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애니메이션 굿즈 가게와 가챠(ガチャ, 뽑기)숍 등이 늘어서 있었다.

행사장에서는 캐릭터 분장을 한 성우가 등장하자 환호성을 내질렀고, 캐릭터 옷을 입은 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거리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부끄러움 없이 자신을 표현하는 이들의 모습은 동경심을 자아낼 정도였다.

아키하바라 외에도 일본에는 많은 ‘오타쿠 거리’가 존재한다. 오사카의 덴덴타운 역시 높은 인지도를 자랑하는 오타쿠 거리다. 아키하바라가 시끌벅적한 번화가라면, 덴덴타운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분위기 속에 애니메이션 굿즈 매장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그중 한 매장에 들어가자,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는 광경이 펼쳐졌다. 나루토, 원피스 등 한 번쯤 들어본 애니메이션 피규어가 곳곳에 진열돼 있었다. 게다가 그 규모도 매우 커서 매장이 총 5층에 달했다. 하나의 쇼핑몰처럼 2층은 만화책, 3층은 문구류를 비롯한 다양한 굿즈, 4층은 캐릭터 분장 도구 및 그림 장비 등을 판매했다. 마치 모든 사람의 니즈를 충족시키겠다는 듯 각양각색의 굿즈가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왜 오타쿠가 되는지가 이해될 정도로 소비 욕구에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인지 일본의 오타쿠 시장은 죽지 않는 시장이라 불릴 정도로 활성화돼 있다. 2017년 기준으로 시장 규모가 8조 원에 달하며 불황기에도 침체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쩌면 취미에 열정을 가진 오타쿠들이야말로 시장을 이끄는 원동력은 아닐까.

 

일반인에게도 낯설지만은 않아

오타쿠뿐만 아니라 현지인들에게도 애니메이션이 친숙하게 다가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애니메이션을 소재로 한 관광지를 돌아보며 찾아볼 수 있었다.

도쿄 이케부쿠로의 실내 테마파크 ‘J-월드’. 입구에서부터 커다란 스크린에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등장해 인사를 건넨다. 입장 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원피스 회전목마이다. 너머의 갈림길에는 저마다 나루토, 원피스, 드래곤볼과 같이 구역이 분류돼 있다. J월드는 여타의 실내 테마파크와는 달리 인기 애니메이션을 소재로 한다. 테마파크 내부에서는 각종 게임을 즐기고 전시물을 감상할 수 있다. 원하는 캐릭터로 분장도 가능하며 식당에는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음식들을 판매한다.

이처럼 볼거리가 많다 보니 테마파크를 찾는 연령층도 중년 부부부터 10대, 20대의 젊은 세대까지 다양했다.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테마파크에서 애니메이션에 대한 선입견을 다소 덜어내고 친숙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제작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세운 ‘지브리 미술관’ 역시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스튜디오 지브리는 1980년대 설립돼 ‘이웃집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 유수한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들을 제작했다. 지브리의 수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직접 디자인한 지브리 미술관은 덩굴로 뒤덮여 자연경관을 해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외관 또한 감성적이고 섬세한 디자인으로 ‘지브리풍’의 느낌을 준다.

내부에 들어서면 보이는 동화 같은 인테리어는 당장이라도 이곳저곳 구경하고 싶게끔 한다. 전시실에는 영사기로 돌아가는 애니메이션 필름이 동심을 자극한다. 그래서인지 지브리 미술관에는 어린아이들뿐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들로 붐볐다.

애니메이션은 지역경제를 살리기도 한다. 돗토리현에 위치한 사카이미나토시의 ‘요괴 마을’이 바로 그 예시다. 유명 만화가 미즈키 시게루의 ‘게게게의 키타로’를 소재로 꾸며진 이 마을에는 기차에 요괴 캐릭터들이 그려져 있고 눈알 요괴가 그려진 택시가 오간다. 현지인들이 상품과 먹거리를 판매하고, 거리에는 눈알 가로등이 들어서 있다. 미즈키 시게루의 작품을 소개하고 각종 요괴 모형들이 전시된 전시관도 존재한다. 본래 인적이 드물었던 마을에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입혀지자 관광명소로 탈바꿈한 것이다.

 

관심과 심취에서 시작된 문화

일본에서 가장 크게 느꼈던 점은 관심과 심취가 문화를 만들고, 그 문화를 시장이 키워나간다는 것이다. 물론 문화 형성의 전제는 다양성의 인정이다. 낯선 애니메이션 문화를 바라보는 현지인들의 태도는 배척이 아닌 수용이었다.

이목을 신경 쓰지 않는 편한 환경 속에, 마니아층은 애니메이션에 천착해 들어가며 문화를 키웠다. 문화가 커지자 기업들이 뛰어들고 관련 산업의 발전과 관광지 조성으로 일반인들도 익숙해졌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켜켜이 쌓아 올린 문화를 다음 세대가 영위하면서 다시 친숙해지는 선순환 구조를 이뤘다.

우리도 선입견을 덜어내고 애니메이션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인정하면 어떨까. 어쩌면 우리나라에도 또 다른 문화의 장(場)이 열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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