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고통으로부터 겨우 벗어날 때에는 시월의 한밤이 벌써 새었다. 어마어마한 윤곽이 방이 비좁도록 움직이자 흐르던 땀방운도 눈물에 몰려 간데 없고 떠날줄 모르는 幻覺(환각)을 짓고 가장 安定(안정)이 없는 발터에로 自身(자신)을 정착시킨다.

‘로마’가 이 世上(세상)을 떠나고 난 요즈음 무척 심해진 환상으로 융통성이 없게 조직이 된 내 머리를 쥐어 짜게 만든다. 感受性(감수성)이 풍부하던 時期(시기)에 ‘로마’는 보통 人間(인간)과 神(신)에 對(대)한 감정을 자기의 天性(천성)처럼 그림의 形式(형식)을 빌어 告白(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와 같은 性格(성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공감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나는 山(산)과 바다로, 가을과 바람을 동무삼아 잔잔한 물가를 딩굴며 바삭바삭 소리 좋은 마른 잎과 뽀얗케 비낀 조약돌을 주워 고르면서 로마 뒤를 짖궂게 따라다녔다. 그가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면 말을 걸어 정신을 산만케 하든가, 간지러움을 주어서 화를 돋구던가, 성가시게 굴길 즐겨한 나였다. 그래서 많은 핀잔과 주먹질에도 그가 미웁고 포악하다고 한번도 왜 생각지 않았을까? ‘로마’의 초옥은 비록 山間(산간)에 있었다. 너무 빛깔이 엷어 초라해 보이지만 사진에서 본 괴테의 집이나 고호의 짙은 갈색이 점빛을 이룬 ‘방가로’에 比(비)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느꼈다. 때문에 조금 작아 답답하였지만 꾹 참았다. 빈터에 마련한 그의 도안이긴 하지만 어떨라구 싶어 채 선명도 붙기 전에 그 안으로 뛰어들고 싶은 강렬한 움직임이 내 몸 안에 확확 퍼졌다. 내가 앉았던 자리에서 멀리 떨어진 동쪽 산봉우리에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고 인자하고 섬세한 느낌으로 가득히 열려진 하늘이 보이는가를 그가 물어왔을 때다. 문득 나는 희미하지만 분명히 어떤 실물의 형태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표정은 감격에 찬 미소같기도 하고 비좁은 방안을 세게 누비며 나의 얼굴을 뒤덮던 그 어마어마한 윤곽의 움직임 같기도 했다.

내가 발을 구르며 선 땅.

나의 진흙발로 이렇게도 무참히 밟고 있는데도 한마디 핀잔도 뺨도 후려치지 않는 침묵의 흙뿐인 여기엔 이다지도 잡초만이 무성한가. <아담과 이브가 흙가운데서 묻히고 싶어 에덴농산을 도망하였을 거라>고 그러한 낭만적이고 지혜로운 선조를 비난해선 결코 흙으로 되돌아갈 순 없을 거라고 때거지를 쓰며 역설한 ‘로마’의 가슴을 디디고 서도 꼼짝없이 흙속에 누웠다는 말인가. 가만히 귀를 무덤 가까이 가져가보았다. 로마의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다. 나는 더 바짝 흙에다 귀를 묻고 땅 속으로부터 들려올 그의 이야기를 기다린다. 눈물이 핑돈다. 사정없이 부벼대는 내 뺨에 뜨겁고 끈적거리는 것. 따갑고 쓰린 것. 시큼한 흙. 이런 것이 부셔져 나가는 가슴 밖으로 무섭게 복바치는 뜨거운 눈물은 질식한 것만 같은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하루의 반쯤은 이미 다 살아버린 듯싶은 피로한 순간에 저만치 자잘걸며 흐르고 있는 물소리 시원히 목에 감겨온다. 크고 작은 바위 틈새로 그것도 매우 바쁘고 잰 속도로 무척 신비스런 흐름이다. 여기에서 균형을 잃은 내 몸둥이가 생활처럼 매우 무겁게 느껴집은 결코 주체할 수 없이 벅차게 닥아선 가을이라는 계절 탓만도 아닌 상 싶다.

신발이 젖을까. 돌을 건너 짚으면서 차츰 아래로 물줄기를 따라 내려갔다. 짜릿하게 시려오는 두 손은 그대로 물에 담고. 이제는 별로 나의 시선을 움직일 것이 없는 것 같다. 되도록 피하고 싶은 시선이다. 저만치 가니 무덤이길래 저리 가람이 많을까. 로마의 무덤은 짐작도 안되겠다. 석양에 비낀 바람의 몹시 차으며 잿빛으로 다닥다바닥 내 마음이 이어있는데 멀리보이는 저 산에 낙엽은 붉게 물들겠다.

(國文科(국문과))-徐明子(서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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