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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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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시)와 詩劇(시극)

詩(시)의 危機(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危機(위기)는 言語(언어)에 無感覺(무감각)한 탓

詩精神(시정신)은 종이 위에 없다

展開(전개)할 問題(문제)를 意識(의식)하라

【承前(승전)】 아무곳에나 손을 내미는 몰염치가 어떤 의미에서 詩(시)의 현실에 잠재해있다면 그것은 앞에 말한 늙은 얻어 먹이의 인습이 그대로 남았음을 뜻한다.

詩(시)는 쓰여지기도 하지만 사실은 의식적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예술 본래의 硬度(경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만들어내되 그것이 정신의 조소과정과 같이 각박할 때 主題(주제)가 빈곤하다느니 혈실에 눈을 떴느니 감았느니 詩人(시인)은 어떠해야 한다느니 문제는 모두 무산해버리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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類型的(유형적)이면서 異質的(이질적)인 現代社會(현대사회)의 일반적인 특징에 대해서 詩人(시인)이 취하게 되는 태도는 크게 두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하나는 自己梗塞(자기경색)의 조개껍질을 덮어쓰는 길이고 또하나는 外部(외부)에의 逸脫(일탈)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다같이 의도하는 詩的形成(시적형성)의 길은, 個人(개인)의 공통성과 공동운명에 바탕하여 거기에 이야기를 건넬 수 있는 會話的(회화적)-場(장)을 얻어내고자 하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초현실주의 이후 詩方法(시방법)에 대한 실험뿐 아니라 그림에, 조각에, 혹은 정신의 분석에 다각도의 시도를 꾀했으면서도 여전히 고절된 정심의 앙리를 고집했던 그 바로 초현실주의와 병행하여 나아온 우리 詩(시)의 현대는 自由詩(자유시)에의 눈뜸에서부터 오늘가지 그것은 活字化(활자화)된 종이 위에 安住(안주)하고 있는 감이 없지 않다. 그것은 詩(시)의 精神移住(정신이주)의 가능성 마저도 스스로 제약하고 만 결과를 낳았다. 쉽게 말하면 그것은 간단한 낭독에 마저 견디어 날 수 없는 정도의 시각위주의 기능상 편칙에 허리띠를 풀고 앉아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술적 정감의 도취를, 대체로 자기와의 대화에 치중하였음으로 사물을 구상적으로 혹은 단적으로 포착하는 수법을 상실한 것이다.

따라서 詩人(시인)은 내부세계의 착란으로 인한 그 난해성의 본거지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기지와 풍자 등 전대에 있어서는 詩(시)의 중요한 요소였던 많은 <손>마저 놓지도 대답해버린 것이다.

거기다가 나날이 奔流(분류)하는 言語(언어)의 홍수에 말리어 혹은 저널리즘의 삿대에 매달려왔다가, 혹은 또 넓은 의미의 매쓰·컴뮤니케이숀의 잦대를 꺾었다가 하면서, 그 言語(언어)가 결과하는 현상들에 대해서 무감각해간다.

詩(시)의 危機(위기)는 사실 여기 배태한다.

고독과 궁핍에 강한 前衛(전위)들이, 主力部隊(주력부대)라는 大衆(대중)의 예술 認識(인식)을 보다 높은 곳으로 유도할 수 있는 자체의 전개를 보여주는 예가 전무함은 아니로되, 거기 전개해야할 문제를 의식해 내어야한다.

詩精神(시정신)의 高揚(고양)을 외치면서 한창 白紙(백지)위에 작전이 머물수는 없다.

소리에 舞台(무대)에 무드에 인간이 생활의 그 기능에 정신을 삽입해 넣은 그 모든 방법에 詩(시)는 介在(개재)해야 하는 것이다.

詩人(시인)은 할 일이 너무 많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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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이 아쉬워진 대로 詩劇運動(시극운동)의 몇가지만 적어본다.

詩人(시인)은 앞에 말한 일반적이고 역사적인 인습 외에 대체로 短詩型(단시형)에 익숙하여 발라드를 경험하지 않고 따라서 드라마의 구성력에서 멀어져 있는데서 쉬이 詩劇(시극)에 손을 안대는 듯 하나 詩本來(시본래)의 정신이나 기교에서 본다면 그것은 쉬이 해결이 날 것 같다. 또 하나는 <리듬>의 문제인데 자유시를 구가하면서 <詩劇(시극)>이라하면 곧 內在詩(내재시)의 <韻(운)>을 연상하는 것 같은데 이것도 詩劇(시극)의 台詞(대사)가 하기야 드라마 자체의 시추에이션이자 푸롯트 외 설명일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두 사람 이상의 언어가 표현하는 이미지의 결핍에서 오는 창조도니 무드라 생각하면 극복 안될 문제도 아니다.

요컨데는 言語(언어)가 부여할 수 있는 頂點(정점)을 복수의 성격에서 교차시켜 빚어내는 뉴앙스의 구사를 무대에서 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흔히 詩劇運動(시극운동)을 詩(시)의 舞台化(무대화)에만 있는 줄 알지만 사실은 그런 구체적인 양식 변화에만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詩劇運動(시극운동)은 하나의 새로운 예술운동으로써 美術(미술)이요 音樂(음악)이요 하는 장르들의 장벽을 예술성의 고양이라는 이름아래 쉬임없이 부셔나가면서 보다 고차원의 것을 만들어 내는데 더 큰 보람이 있는 일이다.

아직은 연출 연기 씨스템이 詩劇(시극)의 것으로 뚜렷하지 ㅇ낳지만 그런 것을 예술인 각자가 자유로운 손으로 만들어 내는데도 의의는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일은 대체로 메카니즘을 매개로 하는 여러 가지 양식-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전같은 것이 생겨서 새로운 전위예술을 필요로 한 것이 아니라 전위적인 예술적 자각 앞에 그런 방대한 수단이 수요된다는 점이다.

가까운 예로 라디오만 할지라도 그것은 <소리>라는 세계의 무드 창조에만 소용한 것이 아니라 詩(시)가 現代(현대)에 와서 거의 놓치고 말뻔했던 청각의 회복에도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詩(시)의 여러방면에의 진출을 뜻함이 아니라 現代詩(현대시) 자체의 본질적인 當爲(당위)와 시키는 것으로 詩人(시인)의 자유로운 손이 만들어내는 창조행위에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방법인 것이다.

예술인식의 침체한 말꼬리에 부단히 放火(방화)하여 詩(시)의 危機(위기)를 이겨나고 現代(현대)에서 초월할 수 있는 비전을 도발하는 일이 바로 詩劇(시극)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손>이다.

(同門(동문)·詩人(시인))

章湖(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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