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윤선(문창4) 作

여행

경윤선(문창4)
등장인물

엄마 (40대 후반)

딸 (20대 중반)

무대

거실 전경. 물건마다 차압 딱지가 붙어 있다.

한가운데에는 3인용 소파가 놓였다. 그 뒤에 커다란 거울이 있다.

엄마, 여행 가방을 끌며 등장한다. 다소 상기돼 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가방을 쥔 채 정신없이 방 안을 휘젓는다.

엄마 그래, 그건 사고였어…

어디선가 괘종시계 울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엄마, 흠칫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잠시 후 딸, 등장한다. 왼손에 손수건을 감고 있다. 등 뒤로 감춘다.

딸 뭐하세요?

엄마 깜짝이야. 무슨 애가 기척도 없이 들어오니!

딸 진정하세요. 화는 건강에 해로워요.

엄마 누가 화를 냈다고 그래?

딸 알겠어요, 제가 착각했어요.

엄마 언제 왔니?

딸 지금 막이요.

엄마 평생 나가지도 않던 애가 웬일이니, 밖엘 다 나갔다 오고.

딸 아실 필요 없잖아요.

엄마 말 참 이쁘게 한다. 다 큰 처녀가 이 시간까지 싸돌아다니기나 하고.

딸 아직 열한 시밖에 안 됐는걸요.

엄마 아예 밖에서 살지 그러니.

딸 전 또, 걱정하시는 줄 알았죠.

엄마 걱정은 무슨. 왜 그러고 섰어? 어서 짐이나 챙겨.

딸 (앉으며) 전 제 몸 하나 부리기도 벅차요.

엄마 젊은 게 한다는 소리가 고작

딸 아버지는요?

엄마 그 인간은 뭣 하러 찾아?

딸 같이 가는 거 아니었어요?

엄마 집안 꼴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저 혼자 살겠다고 내뺀 인간이야. 데려가 달라고 매달려도 내가 싫어. 저것들만 보면 정말이지 가슴속에다 붙여놓은 것 같아서 죄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니까.

딸 어쩌겠어요, 남편인데.

엄마 남편은 무슨 얼어 죽을. 그 인간은 독이야, 독.

딸 이참에 헤어지시면 되겠네요.

엄마 이혼은 뭐, 혼자서 하니?

딸 전화해볼까요.

엄마 그럴 필요 없다. 받지도 않을 거야.

딸 받을지도 모르잖아요.

엄마 됐다니까 그러네!

딸 화는 건강에 해롭다니까요.

엄마 가만히 앉아만 있지 말고 어서 준비해. 하루라도 빨리 이 집에서 나가고 싶으니까.

딸 그래요, 떠나요. 이 집에서 풍기는 피 냄새에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니까.

엄마 무슨 피 냄새가 난다고 그러니?

딸 왜요, 아주 지독하구만.

엄마 니 코가 어떻게 된 모양이구나.

딸 제 몸이 이상해지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엄마 벌써 증상이 나타난다는 거니?

딸 언젠가는 그렇겠죠.

엄마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 건지 분명하게 말해.

딸 염려 마세요. 아직은 아니니까.

엄마 남의 일 말하듯 하지마라.

딸 제 일 같지도 않은 걸요.

엄마 너도 참 천하태평이다. 하긴 일일이 신경 쓴다고 뭐 좋은 거 있겠니. 그런다고 완전히 낫는 것도 아닌데.

딸 (일어나며) 제 말이요.

엄마 어디 가니?

딸 방에요.

엄마 거긴 뭐 하러?

딸 짐 챙기라면서요.

딸 나가면 엄마, 다시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엄마 어쩐담…

딸, 등장한다. 배냇저고리를 들고 있다. 소파에 앉는다.

엄마 아이구 놀래라, 기척 좀 하고 다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겠니?

딸, 듣지 못한 듯 묵묵히 배냇저고리에 손을 대본다.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엄마, 딸과 거리를 두고 소파에 앉는다.

엄마 넌 내 말이 말 같지도 않니?

딸 엄마, 이것 좀 보세요.

엄마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프지.

딸 무슨 말씀이세요?

엄마 그래 내 딸아, 그런 걸 용케도 찾아내는구나.

딸 제가 보물찾기 하나는 잘했죠.

엄마 색이 많이 바랬네. 아주 새하얬었는데.

딸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요.

엄마 근데 너, 손은 왜 그러니?

딸 넘어졌어요.

엄마 다 큰 애가 덜렁대긴.

딸 그래요, 컸죠. 이 배냇저고리가 이젠 제 손바닥만 하니까요.

엄마 나도 니가 영영 어린 애일 줄만 알았다. (사이) 너는 배고프다고 자꾸 보채지, 젖은 안 나오는데 분유 값도 없지, 가스는 끊겼지. 그래도 어떻게 쌀은 있데? 그래서 어떡했겠니. 생쌀을 일일이 다 이로 씹어가지고 먹였지. 넙죽넙죽 잘 받아먹더라. 난 못 먹어도 넌 먹였어. 그렇게 키워놨더니 이젠 지 몸뚱이라고 어디 가서 그런

딸 몸이 깨끗하다고 안 죽는 건 아니잖아요.

엄마 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니?

딸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니까요.

엄마 지 몸뚱이라고 말하는 거 하고는. 널 낳고 키우느라고 난 이가 다 망가졌어.

딸 그렇대도 제가 책임져야 할 일은 아니잖아요.

엄마 내가 미쳤지. 저런 것을 열 달씩이나 품고 있었으니.

딸 태어나기까지는 열 달. 그런데 죽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는군요.

엄마 그래, 이 지지리 복도 없는 것아. 죽을 때 죽더라도 살아 있을 때는 몸 성하게 살아야 하는 거야. 그것만큼 큰 복도 없어.

딸 정말 사는 걸까요.

엄마 무슨 말이니?

딸 산다는 말은 삶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만들어낸 구차한 표현일 뿐이에요. 종내는 다 죽을 텐데. 그럼 죽어가는 거지 살아가는 게 아니잖아요.

엄마 아무래도 니가 이렇게 된 건 그 병 때문인 것 같다.

딸 전 지금 죽는대도 이상할 게 없어요.

엄마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나.

딸 사는 거 자체가 죽는 일이에요.

엄마 너는 말을 해도 꼭 그렇게 정 떨어지는 말만 골라서 하니.

딸 사실인걸요. 1초, 1분, 한 시간, 하루. 우린 매일 그 만큼씩 죽어가고 있어요.

엄마 우리 집안 여자들은 대대로 모두 장수했어. 대체로 아흔 살을 넘겨 살았다구. 덕분에 사람들이 과부 될 팔자라고들 했지만, 그래도 오래 살아야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거야. 니 외할머니를 봐라. 올해 여든한 살이지 않니. 거뜬히 아흔을 넘길 거다. 그때까지 외할아버지가 남기고 간 땅덩이로 아주 호강하며 살겠지. 그런데 그 땅을 니 외삼촌들이 벌써 눈독 들여놨다더라. 인정머리 없는 것들.

딸 나이는 그저 유통기한일 뿐이에요.

엄마 사람이 무슨 통조림이니?

딸 참 재밌을 거예요. 사람들 이마에 저마다 죽는 날짜가 찍혀 있다면.

엄마 끔찍한 소리 마라.

딸 엄마의 유통기한은 길겠죠?

엄마 그래, 난 아주 오래오래 살 거다. 호강이야 못 누리겠지만.

딸 누가 알아요, 아버지가 엄마 앞으로 적금 통장 하나 남겨놨을지.

엄마 쥐뿔도 없는 인간이 뭘 남겨놨겠니? 하늘에서 돈 벼락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게 더 낫겠다. 아무튼 걱정 마. 우리 집안은 장수 집안이니까, 너도 백 살까지는 너끈히 살 수 있을 거야.

딸 생각만 해도 아찔하네요.

엄마 아찔하긴 뭐가?

딸 백 살이라니. 전 그렇게까지 집착하고 싶지 않아요.

엄마 그건 집착이 아니야, 희망이지.

딸 전 마흔 살에 죽기를 바랐어요. 어디에도 혹하지 않을 나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때까지만. 그게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생명선이 길다는 걸 알고는 잠시 좌절했었지만, 곧 있으면 현실이 될 거예요. 저한테는 그게 희망이에요.

엄마 맨날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으니까 쓸데없는 공상만 느는 거야. 그 뱃살도 좀 봐라. 아프리카 난민처럼 배만 볼록 나와 가지고. 그게 어디 아가씨 배라고 할 수 있겠니? 나가서 산책도 좀 하고 그래라. 봄날 햇빛이랑 바람이 얼마나 좋으니. 예전에는 틈만 나면 밖에 나가지 못해 안달하더니만 요새는 왜 그리 노상 한 자리에 앉아가지고 청승을 떠는지 원.

딸 그래서 오늘 나갔다 왔잖아요.

엄마 가뭄에 콩 나듯이 어쩌다 한 번?

딸 그 사람을 만나고 왔어요.

엄마 안 만난다더니.

딸 네, 그 말하려고 만난 거예요.

엄마 잘했다, 잘한 거야.

딸 그런 거겠죠.

엄마 넌 어차피 남자 만날 팔자가 못 되잖니.

딸 그 사람한테도 그렇게 말해줄 걸 그랬어요. 왜 헤어져야 하느냐고 계속 물어오는데, 대답하지 못 했거든요. 뭐라고 말해줘야 할지 몰랐으니까.

엄마 잊어버리렴.

딸 만약 사실대로 말했다면 어땠을까요. 뒤도 안 보고 돌아섰겠죠?

엄마 넌 그것도 병이야. 이미 지나간 일에다 신경 쓰고 후회하는 거.

딸 후회는 안 해요.

엄마 미련 남기는 것도 후회야.

딸 미련이 남아 있다면,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데 있겠죠.

엄마 무슨 좋은 일이라고 떠벌렸어야 했다는 거니.

딸 그 사람은 저를 경멸했어야 해요. 그게 옳아요. 그런 더러운 몸으로 잘도 나를 만나왔구나, 그렇게 말하면서 비웃어야 했다구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화를 낸다거나, 혹은 벌벌 떨어야 했어요. 인간이라면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을 저한테 보여줬어야 했다구요.

엄마 나는 가끔 니가 내 뱃속에서 나온 게 맞나 싶다. 도통 니 속을 모르겠어.

딸 저라고 제 속을 알겠어요.

엄마 너랑 말하다가는 나마저 이상해질 것 같다. (사이) 속이 다 허하네. 뭐 좀 먹겠니.

딸, 고개 젓는다.

엄마, 자리에서 일어난다. 무대 밖으로 나간다.

딸, 엄마가 앉았던 자리를 본다.

딸 (중얼거리듯) 엄마,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딸, 거울 앞으로 간다. 옆으로 서서 나온 배를 확인한다. 

딸 (중얼거리듯) 벌써 이만큼이나 자랐어. 

엄마, 사과와 접시, 과도 들고 등장한다. 소파에 앉자마자 사과를 깎는다.

 엄마 정신 사납다. 좀 앉아라.

딸 엄마 말처럼 몸을 움직이는 게 좋겠어요.

엄마 청개구리가 따로 없어, 정말.

딸 벌써 열한 시가 넘었어요. 아버지한테 전화해볼까요?

 엄마, 손이 떨린다. 과도를 떨어뜨린다. 다시 주워 사과를 깎는다.

 엄마 먹어봐. 아주 달다.

딸 늦게까지 안 들어오시는데 걱정도 안 되세요?

엄마 아무리 먹어도 안 질려.

딸 걱정되지 않느냐구요.

엄마 상처도 하나 없는 게 참 곱게도 생겼지?

딸 (마지못해) 네, 그러네요.

엄마 이게 바로 황금사과야. 참, 뉴스에서 보니까 사과에 항암효과가 있다더라.

딸 사람은 늘 자기들 몸에 좋은 걸 찾아내고, 또 찾아다니죠.

엄마 그게 본능이지.

딸 맞아요. 시대가 변해도 그건 변하지 않을 거예요.

엄마 여기에 니 병을 낫게 하는 약도 들어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딸 사과는 다른 과일을 빨리 익게 만든다던데,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일은 불가능한가 봐요.

엄마 또, 또 엉뚱한 소리. 어서 먹기나 해. 길 떠나면 배고플 테니까.

딸 지금은 배가 고프지 않아요.

엄마 나중에 가서 후회하지 말고 먹어둬.

딸 저더러 배가 나왔다면서요?

엄마 그건 헛배잖니. 얼른 먹어. 사람은 속이 든든해야 해. 못 먹으면 비루먹은 개처럼 비쩍 말라가지고 제 구실을 못하는 법이야.

딸 어차피 죽을 몸, 살찌울 필요 있나요.

엄마 지금은 살고 있잖니.

딸 죽어가고 있어요.

엄마 먹고 싸고 자고 숨쉬고. 그게 바로 사는 거다.

딸 사람들은 고작 그걸 위해서 죽음을 늦추려 하는 거였군요.

엄마 별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그게 바로 건강하다는 증거야.

딸 건강하다고 해서 안 죽을 수는 없어요. 그러니 다 부질없는 짓이죠.

엄마 아무 것도 안 하고 사는 건 인형이나 다를 바 없어.

딸 죽어가는 것보단 죽어 있는 게 나아요.

엄마 넌 애가 왜 그리 부정적이니?

딸 긍정적인 거죠.

엄마 억지 좀 부리지 마. 병 때문이라면 그럴 필요 없어. 이 세상에 병 걸린 사람이 너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잖니.

딸 모든 사람이 병에 걸린 건 맞아요.

엄마 그래, 난 너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딸 바람을 좀 쐬지 그러세요.

엄마 밖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있잖니. 가뜩이나 저 기분 나쁜 딱지 때문에 속상해 죽겠는데, 내 스스로 걸어 나가 그 사람들 입방아에 올라서 좋을 게 뭐 있어.

딸 상관없잖아요. 또 마주칠 사람들도 아닌데.

엄마 넌 없어도 난 있다.

딸 그러시겠죠.

엄마 정말 안 먹을 거야? 사과만큼 건강에 좋은 과일도 없어.

딸 늘 좋은 건 아니에요. 밤에 먹는 사과는 독이니까.

엄마 입맛 떨어지는 소리 그만 해라.

딸 엄마 건강을 생각해서 한 말이에요.

엄마 아주 고맙구나.

딸 별 말씀을요.

엄마 이대로 두면 누렇게 변할 텐데. 아까워서 어쩌나.

딸 그냥 드시던가요.

엄마 넌 그런 말을 듣고도 먹고 싶겠니?

딸 그럼 제가 먹죠.

엄마 먹으랄 때는 안 먹더니.

딸 갑자기 배가 고파졌거든요.

엄마 정말 죽어라고 말을 안 들어요.

 딸, 소파에 앉는다. 사과를 먹는다.

 딸 제가 먹다 남긴 건 당연히 버리실 테죠?

엄마 맘대로 단정 짓지 마라.

딸 안 드실 게 뻔해요.

엄마 아주 내 속에 들어와 앉았어.

딸 엄만 그날 이후로 제가 손 댄 음식은 하나도 안 드셨잖아요.

엄마 내가 왜 그런 짓을 했겠니?

딸 감염될까봐 그러셨겠죠.

엄마 별 소리를 다 하네. 그걸 걱정했다면 너와 마주보고 얘기하는 일조차 없었을 거야.

딸 제 옆에는 안 앉으시잖아요.

엄마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마라. 거긴 그 인간이 앉던 자리라서 그런 거니까.

딸 좋아요, 그렇게 믿겠어요.

엄마 어째 감시당하는 것 같은 게, 영 기분이 찜찜하네.

딸 엄마가 예민하게 반응하시는 거예요.

엄마 하여튼 입은 살아가지고.

딸 걱정 마세요. 머지않아 죽을 거니까.

엄마 그게 엄마 앞에서 할 소리니?

딸 태어났으면 죽는 건 당연한 수순이에요.

엄마 난 널 죽으라고 낳은 게 아니야.

딸 생명은 잉태되는 동시에 죽음을 맞이해요.

엄마 정말 모를 소리만 해대네.

딸 사람들은 꽃이 만발한 나무를 보면서 생의 환희를 느낀다지만, 사실 그들이 보고 있는 건 죽어가는 나무일뿐이죠.

엄마 죽는다는 소리 좀 안 할 수 없니. 정말 듣기가 거북해서 미칠 지경이다.

딸 잠시 잊고 있었네요. 엄마는 매년 건강 검진을 받으신다는 걸.

엄마 말에 뼈가 있구나?

딸 하지만 이젠 그것도 힘들겠죠. 돈이 없으니까.

엄마 니가 걱정할 바 아니야. 돈 나올 구석은 얼마든지 있어.

딸 제가 죽을 때를 대비해서 생명 보험이라도 든 모양이죠?

엄마 그렇다 해도 니가 당장 죽는 것도 아니잖니.

딸 자살이라도 해드릴까요?

엄마 내 앞에서 그 따위 말을 또 지껄이려거든 당장 나가.

딸 꼴 보기 싫으시다면 사라져 드릴게요.

엄마 제발 좀 그래다오.

딸 굳이 엄마와 함께일 필요는 없겠죠. 저는 혼자여도 되고, 아니면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되니까요.

엄마 그 인간한테 간다고?

딸 아버지는 언제나 제 손을 잡아 주세요.

엄마 내가 널 그 인간한테 순순히 보낼 것 같아?

딸 목소리 낮추세요.

엄마 가지 않는다고 말해.

딸 사과 맛이 좋군요.

엄마 그게 지금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딸 엄마도 드세요. 독 사과가 아주 꿀맛이에요.

엄마 갈수록 가관이구나.

딸 과연 황금사과라 할 만해요.

엄마 어서 대답해, 가지 않겠다고.

딸 그건 제 의지에요. 엄마가 이래라 저래라 할 권리는 없어요.

엄마 그래 좋을 대로 하렴. 넌 절대 그 인간을 못 찾을 테니까.

딸 염려 마세요. 저는 아버지를 금방 찾아낼 수 있어요.

엄마 아주 자신만만하구나.

딸 찾는 데는 선수니까요.

엄마 이번에는 힘들 거야.

딸 더 수월할 거예요. 엄마도 도와야할 테니까.

엄마 말이 되는 소릴 좀 하렴.

딸 아버지가 엄마 이름으로 만든 적금통장이 하나 있어요. 곧 있으면 만기일이랬어요.

엄마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안 믿어.

딸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한 걸요.

엄마 내가 직접 봐야겠다.

딸 저도 보여드리고 싶지만 그게 어디 있는지는 아버지만 알아요.

엄마 들통 날 거짓말을 왜 하니?

딸 제가 봤다니까요.

엄마 둘이 똑같아. 한통속이야.

딸 아버지한테 전화해서 어디 있는지 물어볼게요.

엄마 해봤자 안 받을 거라고 했잖니.

딸 그럼 제가 찾아보죠. 틀림없이 안방에 있을 거예요.

 딸, 일어난다.

엄마, 당황한다.

엄마 찾을 필요 없어.

딸 못 믿으시는군요.

엄마 그 인간한테 어디 한두 번 속았어야지. 빚이 없다고? 사업이 잘 돼? 바람을 안 피워? 허, 그 인간은 여태 나를 산송장 취급했어.

딸 아버지는 늘 엄마한테 지은 죄가 많다고 했어요. 그래서 미안하다고.

엄마 내 앞에선 한 번도 그런 내색 한 적 없다.

딸 아시잖아요. 원래 무뚝뚝한 사람인 거.

엄마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천성이 그런 사람이지, 늘 그렇게 눙치고 살았어. 하지만 이제 더는 못 해. 아주 지긋지긋하다구.

딸 이혼하시라니까요.

엄마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니.

딸 그럼 엄마가 그냥 이해하면 되잖아요.

엄마 넌 늘 그 인간 편만 들지.

딸 한 가족끼리 니 편 내 편이 어디 있어요.

엄마 우리는 여태 남남처럼 살아왔어. 단 한 번도 가족인 적이 없었다구.

딸 엄마와 저도 완벽한 타인이었군요.

엄마 그건 니 탓이 커. 넌 나한테 살갑게 굴지도 않잖니.

딸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걸 어쩌겠어요.

엄마 그래, 그 인간이나 너나 원래 그런 족속들이지.

딸 통장을 찾아야겠어요.

엄마 안 찾아도 돼.

딸 엄마한텐 돈이 필요하잖아요.

엄마 그냥 앉아 있어. 그딴 건 없어도 살아.

딸 피 냄새가 나요.

엄마 뭐라구?

딸 장롱 밑구멍에 있을 거예요. 아버진 거기에다 곧잘 돈을 숨겨놓곤 했으니까.

엄마 괜히 시간 낭비할 거 없다.

딸 오 분이면 돼요.

엄마 넌 애가 왜 그렇게 말을 안 듣니? 없어, 없다구.

딸 엄마야말로 왜 그러세요?

엄마 분명 그 인간이 다 썼을 거야.

딸 그럴 리가 없어요.

엄마 거봐라. 넌 늘 그 인간 편이잖니.

딸 아버지가 그랬어요. 엄마 거니까, 절대로 해약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딸, 안방으로 들어가려 한다.

엄마, 딸을 붙잡는다.

딸 떨고 계시는군요.

엄마 추워서 그래. 보일러를 껐잖니?

딸 겉옷을 가져다 드릴게요.

엄마 괜찮아.

딸 가방 안에 있을 거 아녜요. 꺼내 드려요?

엄마 니가 오늘 내 속을 긁어 놓으려고 아주 작정을 했구나. 됐다는데 왜 그러니. 왜 자꾸 말을 안 들어?

딸 손 놓으세요. 아파요.

엄마 앉아. 앉아서 얘기하자.

딸 그거 알아요? 엄마 옷에 핏자국이 있다는 거?

 딸, 엄마의 손을 뿌리친다. 안방으로 들어간다.

엄마, 망연자실, 넋 나간 채 서 있다.

 엄마 난 아냐, 난, 아니라구…

 엄마, 머리를 움켜쥔다.

딸, 안방에서 나온다. 얼굴이 창백하다.

딸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엄마 난 모르는 일이다.

딸 말씀하세요.

엄마 대체, 무슨 말을 하라는 거니?

딸 안방이 온통 피바다예요.

엄마 그건, 내가 한 게 아니야…

딸 절 바보로 만들지 말아요.

엄마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고, 니가 말하지 않았니?

딸 그래서 죽였어요?

엄마 누굴 죽였다는 거니?

딸 아버지요.

엄마 난 죽이지 않았어.

딸 그럼 저 피는 뭐죠? 강도라도 들어와서 난도질을 했단 말인가요?

엄마 그럴지도 모르지.

딸 엄마!

엄마 나 귀 안 먹었다.

딸 경찰을 부르겠어요.

엄마 협박하는 거니?

딸 그러는 편이 엄마 신상에도 좋아요.

엄마 그럴지도 모르지.

딸 (한숨) 아버지 시신은 어디 있죠?

엄마 몰라.

딸 엄마가 모르면 누가 알아요?

엄마 모른다니까.

딸 이 집 안에 있나요?

 엄마, 말이 없다.

딸, 가방을 본다. 그쪽으로 걸어간다.

엄마 손대지 마라. 기껏해야 옷가지야.

딸, 가방을 연다.

쏟아지는 피, 주저앉아 구역질하는 딸

엄마 열지 말라고 했잖니.

딸 눈이라도 감겨드리지 그랬어요.

엄마 경황이 없었다…

딸 정말 매정하시군요.

엄마 난, 그냥 밀쳤을 뿐이야. 남자가 그렇게 힘이 없어 어따 쓴다니… 나는 죄가 없다… 하도 귀찮게 굴길래… 그 인간이 잘못한 거야. 왜 하필이면 문갑 모서리라니?

딸 토막토막, 통조림이 따로 없군요.

엄마 그래, 그 인간 잘못이야… 자기 발에 넘어져서 그렇게 된 거야. 그러게 싫다는데, 왜 자꾸만 달라붙어 가지고…

딸 변명일 뿐이에요. 이제 와서 잘잘못을 따져봤자 아무 소용없어요.

엄마 변명하는 게 아니야. 그건, 내 잘못이 아냐…

딸 잘하셨어요. 어떻게 죽든, 어차피 죽는 건 다 마찬가진데…

엄마 난 정말 잘못이 없어.

딸 알겠어요, 알겠다구요.

엄마 큰소리 내지 마라.

딸, 붕대를 푼다. 칼을 든다. 손바닥을 긋는다. 거울 앞으로 간다. 거울에 피를 칠한다.

딸 죽는 순간은 무척 고통스러울 거예요. 그렇죠?

엄마 뭐하는 짓이니?

딸 전 죽어가고 있어요. 곧 있으면 아버지가 데리러 올 거예요.

엄마 그만 해라.

딸 손바닥에 또 칼집을 내고 싶지 않았는데.

엄마 내 말이 말 같지 않니? 그만 하라니까.

딸 그 사람과 헤어지고 돌아서는데, 누군가 쫓아오는 게 느껴져요. 한적한 골목, 남자가 제 어깨를 잡더니 가슴을 움켜쥐어요. 순간 그 놈 얼굴이 떠올랐어요. 저를 무참히 짓밟으며 바이러스를 옮기던 그때, 그 얼굴이. 남자한테 말했어요. 난, 에이즈 환자예요. 남자가 웃어요. 전 손바닥을 그었죠. 호신용으로 갖고 다니던 커터칼로.

엄마 차라리 칼로 위협하지 그랬니.

딸 더 효과적인 건 에이즈 환자의 피를 보는 일이죠.

엄마 독한 것. 그렇다고 피를 내?

딸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욕망을 잊어버리게 되거든요. 엄마가 기겁하면서 달아나는 그 남자를 봤어야 해요.

엄마 그런 건 수천 번을 보여준대도 싫어.

딸 전 얼마나 웃었다구요.

엄마 흉한 꼴을 보이고도 정신을 못 차리는구나.

딸 제 모습은 정말, 흉했겠죠.

엄마 니가 조신하게 굴었다면 외간 남자가 또 쫓아오진 않았을 거야.

딸 이제 와서 전 뭐가 두려웠을까요. 뭐가 두려워서 손을…

엄마 그만 하렴. 빨간 건 이제 보기도 싫으니까.

딸 엄마도 제 피가 싫은 거죠?

엄마 난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딸 다 알아요. 엄만 제 피가 닿을까봐 두려운 거예요.

엄마 기어이 내가 미치는 꼴을 봐야 직성이 풀리겠니?

딸 걱정 마세요. 엄마한테까지 감염시키지 않을 테니까.

엄마 그 말은 마치 누구한테 병을 옮겼다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딸 뱃속에 아기가 있어요.

엄마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다.

딸 우습죠. 죽어가는 몸으로 임신을 하다니… 하지만 그 사람과 있을 때는 늘 까맣게 잊어버리고 마는걸요.

엄마 혹시라도 그 균 덩어리를 낳을 생각이라면 애초에 접는 게 좋아.

딸 가능하다면 낳고 싶어요.

엄마 아서라, 넌 환자야. 그것도

딸 아직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잖아요. 그러니까, 아닐 수도 있어요.

엄마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니.

딸 매일 밤, 그 놈 뒤를 쫓아가는 꿈을 꿔요. 손에는 칼이나 총을 들고. 하지만 번번이 실패해요.

엄마 그때 일은 그만 잊어버리렴.

딸 엄마, 전 사실 남겨지고 싶지 않았어요. 이 피로 그 남자를 위협하면서도 제발 달아나지 말라고 속으로 빌고 또 빌었어요. 하지만, 달아났죠. 전 혼자 남겨진 채 뚝뚝 떨어지는 피를 보고 있어야 했어요. 그런 제 자신이 너무 낯설었어요. 그래서 도망가고 싶었는데… 전, 그럴 수가 없잖아요.

엄마, 배냇저고리로 피범벅인 딸의 손을 감싼다.

딸, 엄마를 바라본다.

딸 죽는 거 따위 두렵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정말이라구요, 그런데 아버지를 보니까

엄마 궁상스런 소리 그만 해. 벌써 열두시다. 이제 가야지.

딸 또 하루가 죽었군요.

엄마 또 하루를 산 거야. 어서 서둘러.

딸 역시 저는, 남는 게 좋겠어요.

엄마 꼴같잖게 자존심은.

딸 엄마한텐 짐일 뿐이잖아요.

엄마 걷다 힘들면 짐짝 위에 앉아서 쉬면되겠구나. 가방은 니가 끌어라. 묏자리는 마련해줘야 하지 않겠니.

엄마, 밖으로 나간다.

딸, 가방 바라본다.

암전

엄마 가다가 경찰서 좀 들러야겠다.

딸 자수하시게요?

엄마 내가 미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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