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ㅇㅇㅇㅇ

(完(완) 落葉篇(낙엽편)

우리도 한번은 落葉(낙엽)처럼

끝없는 鄕愁(향수)와 슬픈 孤獨(고독)

追憶(추억)의 畵版(화판)

洗劍亭(세검정) 호젓한 물가에 앉아 한나절을 思索(사색)으로 흘려보내고, 저녁 어스름 길을 밟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내 孤獨(고독)한 그림자 위에도 이젠 落葉(낙엽)이 진다.

가을이 짙었나 보다. 흠칫 놀라 하늘을 보면 파아란 眞空(진공)의 그 우아한 낱빛이 면도칼로 그으면 싸악 찢어질 것만 같다.

어둠의 달빛을 타고 우수수 흩날리는 나뭇잎들은 끝없는 鄕愁(향수)와 외롭고 슬픈 孤獨(고독)을 마음에 새겨 준다.

‘구르몽’의 詩(시)에서처럼 ‘落葉(낙엽)은 이끼와 돌과 조롱길을 덮고 있다.’

落葉(낙엽)은 밟는 맛과 타는 냄새, 소중히 간직하는 멋이 있어 좋다.

數年前(수년전)에 册(책)갈피에 끼워둔 銀杏(은행)잎과 갸름한 도토리잎, 바알갛게 原色(원색)을 나타낸 단풍잎, 그리고 菊花(국화)잎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落葉(낙엽)에는 내 옛 追憶(추억)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葉脈(엽맥)만이 앙상한 잎들에서 나는 年輪(연륜)을 생각한다. 해가 바뀔 때마다 하낫씩 더해가는 年輪(연륜), 흔히 수레바퀴 돌 듯 한다고 하지만 가을의 슬픈 품에 안겨 가슴으로 뼈저리게 운반되는 孤獨(고독)을 물리칠 길이 없다.

每年(매년) 이맘 때면 ‘國展(국전)’이 열리고 있는 景福宮美術館(경복궁미술관)으로 가는 中央廳(중앙청) 옆길은 가을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알맞은 散策(산책)의 거리인 것 같다.

노오란 銀杏(은행) 잎이 흩날리는 鋪道(포도) 위에 戀人(연인)들의 발자국 소리가 한층 짙은 感傷(감상)을 내게 준다.

저 貞洞(정동)의 法院(법원)길도 시몬의 落葉(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좋다.

깨끗이 쓸어둔 뜰에서 잠시 눈을 떼면 또 어지럽게 落葉(낙엽)이 깔려든다.

퇴폐한 庭園(정원) 한 구석에 모닥불을 피우고 落葉(낙엽)을 불살라 보라.

은은히 바알간 불꽃을 내며 追憶(추억)의 리트머스시험지는 變色(변색)하기 시작한다.

파아란 연기가 자욱히 뜰에 깔리고 落葉(낙엽)은 그 연기를 타고 또다시 수없이 떨어진다. 落葉(낙엽)을 주워들고 자세히 보면 그것은 이내 追憶(추억)의 畵版(화판)으로 변한다.

故鄕(고향)이 거기있고, 어릴 때 물장난 하던 여울이, 山(산)이, 바다가 왼통 거기 다 있다.

지난 여름 放學(방학)때 어느 少女(소녀)와 함께 海印寺(해인사)엘 다녀온 일이 있다. 며칠 묵는 동안 우리는 이내 그곳의 넘치는 물소리에 익숙해졌다. 서울에 돌아 와서도 그 少女(소녀)는 며칠 동안을 그 물소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이제 새삼 落葉(낙엽)을 한잎 주워들고 바라보매 그때의 그 물소리가 예서 나는 구나! 술잔을 기우리며 대청마루에 앉았노라면 바람에 불려 온 落葉(낙엽)이 술상 위에까지 떨어진다. 얼른 주어서 가슴에 간직한다. 體溫(체온)을 받은 落葉(낙엽)은 꿈꾸듯 가슴 안에서 소근 거린다. 저들의 풍성했던 봄, 여름의 한나절을, 아니 그보다도 그들이 주고 받았던 슬픈 이야기들을 섬겨댄다. 이쯤에서 季節(계절)이 멎어주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落葉(낙엽)이 날리는 밤길을 바바리코트의 깃을 세우고 나란히, 가까운 이와 손을 마주잡고 걸어보라. 더러는 쓸쓸한 公園(공원)의 벤취에 앉아서 있었던 말씀들로 가슴을 채워도 좋다. 아니면 한없이 머언길을 방황하는 짚시처럼 한줌의 군밤을 사들고 서로 서로 입에 넣어주며 해묵은 對話(대화)들로 밤을 세워도 좋다.

人生(인생)도 한번은 落葉(낙엽)이리라. 저푸르고 맑은 가을 하늘아래 잍록 길게 몸을 눕혀 먼데 계신 부모님과 소꿉동무를 생각한다.

어디나 계실 것이면 이맘때쯤 몇줄, 消息(소식)있을법도 한데 헤어진 벗과 사랑하는 이들은 아직까지 찾아오지 않는다. 落葉(낙엽)에 몇 字(자) 적어 띄어 보내면 그들은 이내 반겨와 줄 것 같다. 永郎(영랑)의 小品(소품)에

“오-매 단풍들것네”

장광에 골붙은 감잎 날러오니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 보며

“오-매 단풍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니리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하면서 그림같은 詩(시)를 썼듯이 이제 가을은 落葉(낙엽) 속에 그 모습을 감추고 凋落(조락)해 가고 있다. 추석도 지나고 밤나무에 열렸던 알밤들도 떨어져버린 이제, 동네 꼬마들은 銀杏(은행)나무 아래 모여 돌팔매질을 하며 銀杏(은행)을 줏고 있다.

落葉(낙엽)은 이미 시들고 말라버렸을망정 내가 품고 있는 꿈과 希望(희망)은 落葉(낙엽)이 질때마다 다시금 굳건해 가고 있다.

‘平凡(평범) 속의 非凡(비범)’은 이런 쓸쓸한 가을날 落葉(낙엽) 날리는 거리에, 山川(산천)에, 붓박혀 있는 것인지 모른다. 아, 人生(인생)도 한번은 落葉(낙엽)이리라

(生物科(생물과)) 金萬植(김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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