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얼굴에 햇빛을”-. 이것은 東國劇會(동국극회)가 創立公演(창립공연)으로 내놓은 作品(작품)이다. 原作(원작)은 新銳劇作家(신예극작가) 吳學榮(오학영)同門(동문)이 二個月餘(이개월여)에 걸쳐 心血(심혈)을 기울인 力作(역작)이다. 사실 本校(본교)의 大學劇傳統(대학극전통)은 오랜 것이다. 멀리는 惠專(혜전)때부터 이 方面(방면)의 活動(활동)이 注目(주목)을 끌어왔다. 解放以後(해방이후)에는 兪賢穆(유현목), 李網鉉(이망현), 韓在壽(한재수) 同門(동문)등을 中心(중심)으로 演劇(연극)의 復興(부흥)을 위해서 잊을 수 없는 발자욱을 남겨 놓았다. 兪賢穆(유현목) 同門(동문)은 在學時(재학시)에 이미 ‘海風(해풍)’이라는 學生映畫(학생영화)를 내놓아 國內映畫界(국내영화계)를 놀라게 한 일도 있다. ▲所謂(소위) 敎養人(교양인)이라고 自處(자처)하는 사람들의 演劇(연극)에 對(대)한 理解(이해)는 말이 아니다. 樂劇團(악극단)의 新派調(신파조) 눈물이나 목소리를 聯想(연상)하는 것이 普通(보통)으로 되어있다. 물론 映畫(영화)와 라디오, TV등의 普及(보급)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興味(흥미)가 없다는 理由(이유)도 들 수 있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重要(중요)한 理由(이유)의 하나는 演劇人(연극인) 自身(자신)들에게 있다고 본다. ▲觀客(관객)없는 舞臺(무대)에서의 演技(연기)는 意味(의미)가 없다. 만일 演技(연기)를 하려고 든다면 그것은 한낫 카다르씨스의 行爲(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自忽境(자홀경)에 빠지는 自慰行爲(자위행위)말이다. 여기서 舞臺(무대)로부터 觀客(관객)이 멀어지는 原因(원인)을 깊이 分析(분석)하고 그 復興策(부흥책)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舞臺(무대)로부터 멀어지는 觀客(관객)-. 그래서 危機信號(위기신호)가 노상 舞臺周邊(무대주변)을 감도는 韓國(한국)의 劇界(극계)-. 여기에 새로운 活力素(활력소)는 정녕 없을 것인가. ▲우리 演劇人(연극인)들은 꿈을 喪失(상실)한 것 같다. 指標(지표)를 잃었다는 말이다. 日帝時代(일제시대)에는 民族意識(민족의식)의 鼓吹(고취)와 되찾아야하는 祖國(조국)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다. 演劇(연극)을 指向(지향)하는 意慾(의욕)만은 도처에서 불길처럼 일지만 오래지 않아 사라져가는 것이다.

이것은 곧 演劇人(연극인)스스로가 追求(추구)하는 人間像(인간상)이 없기 때문이다. ▲觀客(관객)들은 希望(희망)한다. 그들의 環境(환경)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실낫같은 꿈이라도 希望(희망)한다. 그들의 울분과 착잡한 精神(정신)의 內部(내부)를 파헤쳐 주기라도 希望(희망)한다. 그러나 우리의 舞臺(무대)에는 飜譯劇(번역극)이 범람하여 通(통)하지 않는 사투리로 에워싸혔다. 학대받는 劇界(극계)엔 영영 햇빛이 없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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