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을 위한 일이었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잡히는 것은 없었다. 공허뿐이다.

열흘 전 엄마가 마지막으로 현희를 달랬다. 집에 내려가서 한학기 동안은 쉬었다가 다음 학기에 상경하라고 위협도 했다. 결국 아버지도 엄마도 현식이 얘긴 한마디도 없이 시골로 내려 가셨다. 엄마가 내려가시던 날 밤 현희는 다방‘밀궁’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밖앗공기가 살갗을 자극했다. 현선생님은 바로 지금의 이구석진 자리에 앉아 계셨다. 벌떡 일어 서시면서 맞은 편 자리에 자기를 앉히며 현선생님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떻게 나왔어? 방금 현희께 갈려고 하던 참인데 괜찮아?”

“…영민하고 싶어요 그렇지만 어떻게 할수도 없어요. 저의 모든 감정과 지혜는 제육신에서 빠져 나간지 오래예요.”

“그런데 마음을 쓰기엔 현희의 건강이 아직 허락을 안할 꺼야. 어떠한 역경과 혼란 속에서도 이성으로써 과감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위대한 것이야. 운명은 사람을 차별하지는 않아. 사람자신이 운명을 무겁게 짊어지기도 하고 가볍게 차버리기도 할 뿐이야. 운명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약한 것이기 때문이야. 자신이 약하면 운명은 그만큼 강해지고 비겁한 자는 늘 운명이란 갈퀴에 걸리고 말아.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냐. 이미 二○○○(이공공공)년 전의 세네카가 한 말이야.”

“그렇지만 자신을 가눔하기엔 너무 센 강물인걸?”

“강물을 막을려고 하는 것은 현희에겐 힘겨운 일이야. 그 강물을 뛰어 넘어야지. 알렉산더 대왕도 말야 세계가 무수히 있다는 것을 아낙사고라스에게 듣고 울었데. 그래서 친구들이 무슨 변이라도 생겼나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어. 세계가 그렇게 무수히 많은데 나는 아직 그 하나도 정복하지 못하였다는 것이 비탄할 만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느냐”고 말야. 인생은 하나의 투쟁 속에 있는거야. 그러나 싸울 상대는 누구도 아닌 자기 운명이야.“

“알겠어요. 그러나 강물은 흘러가면서 너무 큰 모래섬을 남겼어요. 수십년 동안 강물이 흐르며 그 모래섬을 조금씩 침식시킨데두 묻혀머린 만큼 상흔(傷痕(상흔))은 커갈꺼에요. 그 모래섬이 완전히 묻혀 버릴땐 전 제자신에서 해방될 거구요. 내 육신에서 빠져나온 가련한 영혼으로….”

“현희, 자신을 학대하지 말아요. 내 얘길 잊었어? 강물이나 모래섬은 누가 만든 것도 아냐. 우린 모두 그 속에 몸둥이를 담곤 서로가 강물을 이루어 바윗덩걸에 부딪쳐가며 흘러갈 뿐야”

“허지만 엄마까지두 현식이 얘긴 한마디두 하시잖구 내려가셨어요. 그게 더 고통스러워요. 제 손으로 엎어버린 일이 아니래두 온통 조여드는 것 같아요. 질식할 것만 같아요. 뺨이라두 한차례 때려 주셨다면 전 오늘 밤차로 시골내려갔을 꺼예요, 엄마가 곁에 있어 준 이 한달 동안 전 놀라울만치 성숙해 졌다는 것을 느꼈어요”

“……”

“이젠 생활의 변화를 가져야겠어요. 지금의 하숙을 떠나긴 싫지만 주위를 정리해야겠어요?

“현흰 아직 안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무리해가며 고통을 얻을 이유는 없는 것 같아”

현선생님은 화난 사람처럼 담뱃불을 짓눌러껐다.

“네? 벌써?”

“나두 생각밖이었어”

현선생님은 드리워진 머리칼을 뒤로 쓸어올리며 건너다 보셨다. 그 속엔 가눔할 수 없는 연민의 그늘을 이루고 있었다. 그 눈길은 내 가슴 밑바닥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옅은 구둣소리에 눈을 떴다. 밀크가 가느다란 김을 올리고 있는 그 뒤로 현선생님이 웃으며 가까이 오고 계셨다.

“메모 봤어?”

“…?”

“전언판에 꽂아 두었었는데…못봤군”

“찾으셨다구요?”

“응, 모래 떠나게 됐어. 노스웨스트로”

“아!”

현희는 현기를 느꼈다. 놀라워야 할 일은 아니었지만 무언가 커다란 것이 가슴에 안겨졌다. ‘초원’에서의 일이 생각켰다. 스스로 움이 온통 범벅된 자신을 보았다. 발딱 일어났다. 재빨리 ‘밀궁’을 나왔다.

“현희-” 약간 격조한 듯한 현선생님의 부르는 소리가 목덜미에 와서 감기는 것 같았다. 더 빨리 뛰었다. 어둠이 깔린 거리엔 분주히 오고가는 행인으로 한낮을 무색케 했다. 건널목이다. 너댓 사람이 일렬로 서 멍청히 서 있다. 빨간 불이 켜졌다.

<서시오>

숨이 찼다. 현희는 잦아질듯한 피로를 가눔하며 전선주에 기대서서 앞을 보았다. 네온에 눈이 부셨다.

갑자기 어깨에 무게를 느꼈다. 따뜻한 손길이 와닿는다. 현희는 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어깨의 손위에 자기의 손을 포갰다.

눈물이 뺨을 타고내렸다.

<강물이나 모래섬은 누가 만든 것도 아냐. 우린 모두 그 속에 몸둥이를 담곤 서로가 강물을 이루어 바윗덩걸에 부딪혀가며 흘러갈 뿐야> 다방‘밀궁’에서의 그 차분하던 현선생님의 말씀이 허허로워진 가슴 저 구석에 조용히 울려 퍼지는 환각을 잡았다.

이제 ‘가시오’의 씨그넬이 울린 것이다. 우린 모두 이렇게 네거리의 건널목에 서서 파란 불이 켜질 때 바쁘게 건너가야하는 대기자들이다.

통금이 가까워 온 거리엔 어둠이 더 짙게 깔려가고 있었다.

 

<國文科(국문과)> 金靜瑗(김정원) 吳明哲(오명철)(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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