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조)‧白先生(백선생)과의 異論(이론)을 提示(제시)하면서-

崇高(숭고)한 民族的使命(민족적사명)

兩者(양자)보두 短點(단점)만 얘기 했을뿐

再評價(재평가)해야 할 ‘로만主義(주의)’

“로만主義(주의) 定義(정의)는 語源學(어원학)의 問題(문제)도 아니고 學說(학설)의 問題(문제)도 아니다. 오히려 歷史(역사)의 問題(문제)다. 로만主義(주의)라는 말은 그 자체의 뜻보다 作家(작가)의 作品(작품)이 歷史(역사)를 通(통)하여 주어진 뜻의 계속에서 채워지는 것 뿐이다.”라고 부론티에르(Fo Bruntiere)는 말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뜻의 繼起(계기)를 具體的(구체적)으로 우리의 近代文學史(근대문학사) 속에서 찾아내는 일이 必要(필요)하다. 따라서 로만主義(주의)라는 具體的存在(구체적존재)의 志向性(지향성)을 直觀(직관)하고 分析(분석)함으로써 그 本質的(본질적)인 繼起(계기)의 包含如否(포함여부)에 따라 對象(대상)을 가려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와반대로 랏셀(Lassare)같은 사람은 “空想(공상)과 現實逃避(현실도피)”라고 공격도 하였으며 티게므(P.V.Tieghem)는 古典主義(고전주의)-로만主義(주의) 視野(시야)의 限定(한정)-視野(시야)의 擴大理智(확대이지)-感性(감성) 藝術法則(예술법칙)-自由(자유)로운 個性(개성) 人工的趣味(인공적취미)-歷史的眞實(역사적진실) 그리스 로마의 模倣(모방)-國家民族的意識(국가민족적의식), 이렇게 古典主義(고전주의)와 로만主義(주의)를 對照表(대조표)로써 두 思潮(사조)를 비교하기도 했다.

이상으로 간단한 예의 西歐(서구) 로만主義(주의)의 槪念規定(개념규정)을 보아왔고 다음으로 우리나라의 로만主義(주의)에 對(대)한 그 槪念規定(개념규정)을 찾아보면 不幸(불행)히도 로만主義(주의)에 對(대)한 硏究(연구)가 거의 없으며 다만 趙演鉉(조연현)선생과 白鐵(백철)선생이 文學史(문학사)에 의한 순서로서 거쳐갔을 뿐 이렇다 할 論及(논급)도 없다. 趙演鉉(조연현)先生(선생)은 ‘韓國現代文學史(한국현대문학사)’에 ‘韓國(한국)의 로만主義(주의)란 三‧一獨立運動(삼‧일독립운동) 뒤의 社會的(사회적) 民族的(민족적) 절망과 出發(출발)의 交錯(교착)에서 빚어진 靑年的(청년적)인 感傷(감상)과 흥분의 氣分運動(기분운동)이엇으며 이는 엄격히는 一種(일종)의 로만的(적) 風潮(풍조)로밖에 볼 수 없는 感傷的(감상적)허영이었다.’고 말하였으며 白鐵(백철)先生(선생)은 ‘新文學思潮史(신문학사조사)’에서 獨逸(독일)의 로만主義(주의)를 ‘理想(이상)‧感情(감정)‧憧憬(동경)‧思像(사상)‧感激(감격)의 一典型(일전형)과 非自然的要素(비자연적요소) 病的要素(병적요소) 곧 時代勢力(시대세력)과의 同伴(동반)을 不肯(불긍)하고 過去(과거)의 鄕愁的感傷(향수적감상) 病的幻想(병적환상)과 창백한 憧憬(동경)이며 歷勢(역세)‧絶望(절망)‧病(병)‧暗黑(암흑)‧神秘(신비)’라고 規定(규정)하여 理想主義的(이상주의적) 傾向(경향)과 病的感傷主義的(병적감상주의적)인 傾向(경향)으로 區分(구분)하여 이 분류를 그대로 韓國(한국)로만主義(주의)에 적응하여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趙演鉉(조연현)先生(선생)이나 白鐵(백철)先生(선생)의 所論(소론)을 본다면 兩說(양설) 모두 一理(일리)가 있긴 하나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로만主義(주의)의 一面(일면)을 말하고 있을 뿐이며 구태여 로만主義(주의)의 短點(단점)만을 말했을까 하는 點(점)에서 그 첫째의 異論(이론)이 있다.

近來(근래)에 이르도록 모든 評價(평가)들은 一言之下(일언지하)에 로만主義(주의)라 하면 病的(병적)이고 感傷的(감상적)이라고 規定(규정)지었으나 어느 時代(시대)의 그 어떤 思潮(사조)이던 모두 一長一短(일장일단)이 있는 法(법)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로만主義(주의)란 위와 같은 短點(단점)만으로 形成(형성)되고 成立(성립)되었는가?

韓國(한국)의 로만主義(주의)는 西歐(서구)처럼 古典主義(고전주의)에 對(대)한 反動(반동)으로 생긴 것은 아니다.

이 땅의 로만主義(주의)란 어디까지나 封建主義(봉건주의) 밑에서 억압되었던 感性(감성)과 理性(이성)이 近代(근대)에 눈뜸으로 해서 비로소 해방되면서 또 이어 닥치는 韓日合倂(한일합병)이라는 民族的(민족적) 悲劇(비극)이 民族意識(민족의식)의 각성을 부르짖게 되면서 하나의 커다란 물결이 되어 용솟음치기 시작한 것이며 이것이 바로 三‧一運動(삼‧일운동)으로 化(화)한 것이다.

여기에서 西歐(서구)의 文藝思潮(문예사조)의 영향을 섞어 가면서 反動(반동)할만한 古典(고전)대신 封建(봉건)과 日本(일본)의 침략이라는 與건下(여건하)에 民族意識(민족의식)을 基本要素(기본요소)로한 韓國的(한국적) 로만主義(주의)를 낳게 만들었지 결코 종래의 規定(규정)(즉 兩先生(양선생)의 規定(규정)처럼 病的(병적) 感傷的(감상적) 無力(무력)한 것이라 斷定(단정)할 수 없는 特殊性(특수성)이 介在(개재)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떠한 고난과 절망 속에서도 希(희)망을 버리지 않는 굳건한 精神的(정신적) 支柱(지주)로서의 숭고한 民族的(민족적) 使命(사명)을 이끌어 나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은 時代區分(시대구분)으로써 趙‧白先生(조‧백선생)과의 두 번째 異論(이론)을 展開(전개)하면서 韓國近代(한국근대)로만主義(주의)를 더듬어 보겠다.

韓國(한국)의 新文學史(신문학사)를 볼 때 여러 文藝思潮(문예사조)의 區分(구분)이 석연하지 않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歷史的(역사적) 特殊性(특수성)을 보지 않고는 新文學(신문학)을 이해 할 수가 없다. 그것은 韓國(한국)의 近代過程(근대과정)이 檀紀(단기)4227年(년) 甲午更張(갑오경장)(AD1894年(년))으로 부터라고 보는 史家(사가)들의 見解(견해)에 依(의)해서다. 곧 이때는 이미 西歐(서구)에서는 四,五世紀(사,오세기)에 걸친 近代過程(근대과정)이 끝이 나고 現代的過程(현대적과정)을 밝기 시작한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韓國(한국)은 近代(근대)의 첫발걸음을 내딛게 됨과 同時(동시)에 또 現代(현대)의 거센 물결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近代文學上(근대문학상)의 韓國(한국)로만主義(주의)의 時代的區分(시대적구분)을 볼 것 같으면 두 說(설)이 있다.

첫째 趙演鉉(조연현)先生(선생)의 ‘廢墟(폐허)’誌(지)와 ‘白潮(백조)’를 中心(중심)한 時代區分(시대구분)과 둘째 白鐵(백철)先生(선생)의 新文學思潮史(신문학사조)를 보면 1917年(년) 李光洙(이광수)의 ‘無情(무정)’으로부터 시작하고 朱耀翰(주요한), 金石松(김석송), 趙抱石(조포석)의 自然親近(자연친근)과 理想主義的傾向(이상주의적경향)의 新傾向派(신경향파)의 나타남에 까지 이르는 連脈(연맥)과 ‘白潮(백조)’誌(지)를 中心(중심)으로한 病的(병적) 感傷主義的(감상주의적)인 傾向(경향)으로 大別(대별) 할 수 있다.

물론 이 兩說(양설) 역시 타당한 見解(견해)일지는 모르나 槪念規定(개념규정)의 次異(차이)에 따라 이와같은 時代區分(시대구분)과 意義(의의)마저 달라 지는 것이다. 곧 兩先生(양선생)은 病的(병적)과 感傷的(감상적)인데 第一重點(제일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나는 共通性(공통성)과 아울러 또 하나의 큰 特徵(특징)으로서 民族意識(민족의식)의 각성을 더욱이 보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나의 의문이 있다.

즉 말하자면 1908年(년) 崔南善(최남선)에 依(의)하여 刊行(간행)된 ‘少年(소년)’誌(지)의 출발은 三‧一運動(삼‧일운동)이 일어나기 까지의 約(약)10餘年間(여년간) ‘靑春(청춘)’誌(지)와 泰西文藝新報(태서문예신보)를 망리한 所謂(소위) 前期文學運動(전기문학운동)이 횃불로서 三個誌(삼개지)를 通(통)하여 일관하여 흐른 계몽의식과 더불어 民族(민족)의 運命(운명)을 건 民族意識(민족의식)과 自我意識(자아의식)의 각성을 부르짖음으로서 韓國(한국)의 初期(초기)로만主義時期(주의시기)를 장식하였고 一九一九(일구일구)년 近代的(근대적)인 純文學誌(순문학지)‘創造(창조)’誌(지)의 出刊(출간)으로부터 ‘廢墟(폐허)’ ‘白潮(백조)’誌(지)를 中心(중심)하여 一九二五年(일구이오년) 敎傾向派文學(교경향파문학)의 出現(출현)까지 所謂(소위) 後期文學運動期間(후기문학운동기간)을 일관하여 흐른 퇴폐와 感傷(감상)과 個性文學(개성문학)의 確立(확립)으로써 이룩된 것이 바로 中期(중기)로만主義(주의)라고 보며 一九二六年(일구이육년) 崔南善(최남선)의 時調集(시조집) ‘百人煩惱(백인번뇌)’의 出版(출판)으로부터 一九三一年(일구삼일년) 만주사변을 계기로해서 이룩된 日本(일본)의 暗黑政治(암흑정치) 및 소위 藝術派(예술파)의 등장까지 時調(시조)의 부흥과 歷史(역사)소설의 등장으로 이는 오로지 民族意識(민족의식)의 結晶(결정)임과 民族文學(민족문학)의 전통을 세우는 터전을 이룬 것을 後期(후기)로만主義(주의)로 본다.

近代短篇소說(근대단편소설) ‘少年(소년)의 悲歌(비가)’가 李光洙(이광수)의 지음으로 발표되고 最初(최초)의 長篇小說(장편소설) ‘無情(무정)’이 每日新報(매일신ㅂ)에 연재되고 뒤이어 많은 小說(소설)이 같은 李光洙(이광수)의 손으로 발표되었는데 그의 主題性(주제성)을 보면 모든 作品(작품)이 한결같이 開化(개화)하는 계몽의식을 지녔으되 民族意識(민족의식)의 각성과 自我意識(자아의식)(自我(자아)와 愛情(애정))의 각성을 부르짖고 있는 것이 그의 初期作品(초기작품)에 많이 나타나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음 泰西文藝誌(태서문예지)를 보면 一九一八年(일구일팔년) 張斗徹(장두철)에 依(의)해서 刊行(간행)된 韓國初(한국초)의 週刊文藝誌(주간문예지)로서 西歐文學(서구문학)의 소개가 目的(목적)이었으나 國內作品(국내작품)도 發表(발표)하되 主(주)로 詩(시)에 있어서 新體詩(신체시)가 完全(완전)한 近代(근대)에도 發表(발표)하는 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作品(작품)을 보면 個個(개개)의 作品(작품)이 모두 作家(작가)에 따라 個性的(개성적)인 경향을 띠웠다는 點(점)을 들 수 있다.

그리하여 여기서 훈련된 作家(작가)들이 모두 中期(중기)로만主義(주의)의 爛熟(난숙)에 꽃을 피웠던 時期(시기)에 활약한 詩人(시인)들이었음을 생각할 때 여기에는 必然的(필연적)인 관계성이 있었음을 추측하고도 남음이 있음을 믿는다.

(國文科(국문과))   崔英進(최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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