近來(근래)에 보기드문 秀作(수작)

劇會(극회) ‘東國(동국)’의 前進期待(전진기대)

現實(현실)로 向(향)한 준열한 批判意識(비판의식)

劇會(극회) ‘東國(동국)’의 創立公演(창립공연)인 “그 얼굴에 햇빛을”(全六景(전육경))은 오랜만에 演出家(연출가) 李光來(이광래)씨의 銳敏(예민)한 現代的感覺(현대적감각)과 原作者(원작자) 吳學榮(오학영)씨의 强鞠(강국)한 對社會的意識(대사회적의식)이 잘 調和(조화)가 되어 젊은 演劇人集團(연극인집단)의 새로운 出發(출발)에 意義(의의)있는 紀念公演(기념공연)이 되었다.

이 劇會(극회)가 원래 同校(동교) 出身(출신)의 演劇人(연극인)과 在學生(재학생)들이 混合(혼합)된 까닭에 ‘팀웍’이 고르지 못해 劇的(극적)인 ‘무드’造成(조성)에 있어서 ‘톤’이 弱(약)해져 學生劇的(학생극적)인 냄새가 약간 비치기도 했지만 原作(원작)이 지니는 意味表象(의미표상)이 풍부한 對話(대화)와 導入部(도입부)부터 전개되는 密度(밀도)가 强(강)한 ‘드라마’의 設定(설정)으로 本格的(본격적)인 雰圍氣(분위기)를 恢復(회복)하였다.

이 演劇(연극)의 主題(주제)는 喪失(상실)된 方向感覺(방향감각)을 追究(추구)하는데 있다고 보는데 첫째 高率(고율)의 租稅法(조세법)을 上程(상정)하려는 與黨國會議員(여당국회의원)을 野堂系(야당계)의 靑年團體員(청년단체원)인 張基鎬(장기호)(李成雄(이성웅)·金茂生(김무생)扮(분))가 殺害(살해)한다. 이 ‘테로리스트’의 殺人意識(살인의식)은 많은 國民大衆(국민대중)에게 큰 부담을 주는 稅金(세금)을 引上(인상)하려는 國會議員(국회의원)을 除去(제거)하는 것은 조금도 罪意識(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正當(정당)하다는 意識(의식)밑에서 決行(결행)된다. 마치 賣國奴(매국노) 李完用(이완용)을 殺害(살해)하는 것처럼…그러나 國會議員(국회의원)은 殺害(살해)되어도 租稅法(조세법)은 通過(통과)되고 만다. 결국 남는 것은 人間(인간)을 殺害(살해)했다는 것 뿐인데 作家(작가)는 여기서 ‘테로리즘’에 대한 강열한 批判意識(비판의식)을 짙으게 풍겨주고 있다.

“罪(죄)와 罰(벌)”의 ‘라스코르니코프’처럼 이 演劇(연극)의 主人公(주인공)도 社會(사회)의 腐敗(부패)와 矛盾(모순)을 止揚(지양)하려는 行動(행동)을 殺人(살인)하는 것으로 代替(대체)해버리는 커다란 誤謬(오류)를 犯(범)하고 있다. 그런데 正義(정의)를 殺人行爲(살인행위)로 보아버린 問題(문제)의 焦點(초점)이 보다 깊이 파고들어야할텐데 演出(연출)은 危機意識(위기의식)에 몸부림치며 深淵(심연)으로부터 脫出(탈출)하려고 하는 畫家(화가)를 이와 對構(대구)시키는데 置重(치중)함으로써 새로운 狀況(상활)을 加入(가입)시키려 했으나 오히려 主題(주제)가 別行(별행)되어 劇(극)의 深度(심도)가 약해져버렸다. 그것은 물론 ‘라스코르니코프’의 이른바 宗敎的(종교적)으로 救援(구원)을 받는 19世紀的(세기적)인 思想(사상)과는 달리 僞善(위선)과 僞惡(위악)과 矛盾(모순) 속에 꼭꼭 엉매인 社會惡(사회악)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려는 現代意識(현대의식)이 깃들어 있는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썩어빠진 僞惡(위악)과 僞善(위선)에 가득찬 現實(현실)의 斷面(단면)에 대한 준열한 批判意識(비판의식)이 現代的(현대적) 狀況(상황) 속에 一貫(일관)되어 흐르고 있는 점에서 演出(연출)과 더불어 近來(근래)에 보기 드문 秀作(수작)이라고 본다.

이러한 劇的狀況(극적상황) 속에서 主人公(주인공)인 ‘데로리스트’는 喪失過程(상실과정)에 있는 方向感覺(방향감각)의 限界意識(한계의식)을 內面的(내면적)으로 燃燒(연소)되는 演技(연기)를 풍겨내지 못하고 그저 精力的(정력적)이고 意志的(의지적)인 鬪士型(투사형)으로서 外的(외적)인 演技(연기)에 흐르고 말았다. ‘떠불·캬스트’중 金茂生(김무생)은 약간 內面的(내면적)이고 李成雄(이성웅)은 外面的(외면적)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두 사람이 다 張基鎬(장기호)가 지니는 內的外的(내적외적)인 것이 엉클어진 錯雜(착잡)한 心理表現(심리표현)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리고 이 作品(작품)의 尹女士役(윤여사역)의 李惠璟(이혜경)은 이 劇(극)을 끌고가는 ‘메인스타’로서 듬직한 演技(연기)를 보여주었으나 愛憎(애증)의 交錯心理(교착심리)가 자꾸만 感動化(감동화)되었고 어딘지 動作不足(동작부족)의 느낌이었는데 그것은 씨가 聲優生活(성우생활)에 專念(전념)한 나머지 舞臺表現(무대표현)과 距離(거리)를 가진데 있다고 보는데 그런데로 無理(무리)없이 自己役(자기역)을 消化(소화)했다고 본다.

한편 社會惡(사회악)에 밑바닥으로부터 몸부림치는 畫家(화가) 玄岩役(현암역)의 金基一(김기일)은 지나친 몸부림이 演技(연기)의 ‘오바’를 가져와 처음부터 끝까지 꾁꾁 소리만 지르고 말았는데 ‘크라이막스’의 脫出(탈출)하는 場面(장면)에 이르러서도 演技(연기)가 아닌 熱辯(열변)을 吐(토)하고 말았다. 이 點(점)은 演出者(연출자)도 함께 責任(책임)이 있다고 본다. 要(요)는 社會惡(사회악)의 集團(집단) 속에서 그래도 한줄기 믿음을 주는 人物(인물)이었는데 그 表情(표정)을 차분히 가라앉은 內的(내적)인 心理(심리)의 깊이에서 ‘이메지’되었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主役(주역)을 에워싼 傍役(방역)가운데서 단연 異彩(이채)를 띠운 것은 ‘빠·껄’인 負愛役(부애역)(金錦枝(김금지)扮(분))이었는데 역시 줄곧 舞臺演技(무대연기)의 수련을 쌓은 탓인지 自由自在(자유자재)한 動作(동작)이 능숙능난했었고 약간 ‘오바’된 感度(감도)도 있지만, 막돼먹은 淪落女(윤락녀)의 性格(성격)을 ᄁᆞᆷ직스럽게도 헤치웠다. 그 相對役(상대역)인 鄭監督(정감독) (張時權(장시권)扮(분))도 ‘파트너’로서 좋은 演技(연기)를 보였으며 특히 畫家(화가)와의 ‘아이로닉’한 對話(대화)의 演技處理(연기처리)는 훌륭했다.

그리고 畫家(화가)의 愛人(애인)이며 張基鎬(장기호)의 동생인 基淑役(기숙역)의 金順子(김순자)는 그 淸純(청순)한 모습이 社會惡(사회악)에 물들지 않은 신선한 ‘이메지’가 연상되어 맑은 演技(연기)를 보여주었다.

한편 金刑事役(김형사역)의 丁海昌(정해창)도 ‘스타일’이 멋있게 잡힌 刑事役(형사역)을 해주엇는데 좀 더 ‘인테리젠스’한데가 있었으면 했고 또 檢事(검사)보다 두드러진 高姿勢(고자세)의 演技(연기)는 刑事(형사)의 位置(위치)에서 볼 때 더 두드러진 느낌이 있다.

하여튼 이번 公演(공연)은 現代的(현대적) 狀況意識(상황의식)에서 새로운 方向感覺(방향감각)을 摸索(모색)하려는 努力(노력)이 분명히 表現(표현)되고 있어 앞으로도 劇會(극회) ‘東國(동국)’의 公演(공연)에 크게 期待(기대)한다.

【글쓴이·評論家(평론가)】 崔一秀(최일수)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