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學街(대학가)의 生活(생활)을 中心(중심)으로

大學(대학)의 學風(학풍)은 언제나 强調(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學風(학풍)은 몇몇 사람의 努力(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大學(대학)마다의 獨特(독특)한 精神(정신)이 確立(확립)되어야하고, 다시 全體構成員(전체구성원)속에 完全(완전)히 용해되어 自然(자연)스럽게 發散(발산)되어야 한다. 學生(학생)과 敎授(교수)들의 硏究態度(연구태도)로부터 ‘캠퍼스’의 사소한 日常生活(일상생활)에서까지 거의 똑같이 풍겨나오는 것이어야한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學風(학풍)이 있을까. 여기 外國大學(외국대학)의 學風(학풍)을 ‘캠퍼스’中心(중심)으로 엮어본다.

 

獨墺(독오)의 學風(학풍)

‘빈’大學(대학)을 中心(중심)으로

李泰永(이태영)

入學(입학)보다 좁은 卒業門(졸업문)

試驗(시험)은 筆記(필기)보다 口頭(구두)로

낡은 가방들고 音樂會(음악회)에도

 

獨逸(독일)사람들에게서 六年餘(육년여)산 追憶(추억)이 되사려오르는 테마이기에 多少感傷的(다소감상적)이기도 하다. 먼저 學問硏究(학문연구)의 自由(자유)분위기를 造成(조성)해주는 社會相(사회상)을 一說(일설)하기로 하자. 1945年(년) 終戰後(종전후) 獨逸國民(독일국민)들의 慘相(참상)이란 우리가 들은바와 같이 文字(문자)그대로 苛酷(가혹)했다고 한다. 法(법)과 秩序(질서)를 지킬줄 아는 그네들에게도 한동안은 法(법)이 權威(권위)가 서지않았었다. 例(예)컨대 WienerWald<윈의숲>산마루에는 自然保護(자연보호)라는 警告板(경고판)이 뚜렷이 붙어있었는데도 그 當時(당시) 빵도 제대로 못먹던 그네들은 炭(탄)이 없어 뗄감이 없으니 禁止區域(금지구역)의 나무를 베어다 떼었다고 한다. 戰爭中(전쟁중)은 勿論(물론)이요 戰後(전후)에도 1950年度(년도)까지 食量配給制(식량배급제)를 가졌었다고 하며 그때의 苦生(고생)했다는 이야기를 늙은 婦人(부인)네들한테서 들으면 우리네가 倭政(왜정)때 깨묵밥도 제대로 못먹던 때 만치나 窮(궁)했는가 하는 짐작이 간다. 그 當時(당시) 政治的(정치젂)으론 四個國占領治下(사개국점령치하) 였기 때문에 오랜 文化傳統(문화전통)을 가진 自尊心(자존심)도 죽여야했고 또 窮乏(궁핍)에서 派生(파생)된 共産分子(공산분자)들의 策動(책동)하는 社會紊亂(사회문란)도 적지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1946,47年(년)의 가장 大端(대단)했던 經濟混亂(경제혼란)을 克服(극복)한 그네들은 全國民的(전국민적)인 耐乏生活(내핍생활), 合理的(합리적)인 生活態度(생활태도), 爲政者(위정자)들의 老鍊(노련)한 政策遂行(정책수행), 行政府(행정부)의 堅實(견실), 오랜 歲月(세월) 國民生活(국민생활)에 뿌리박은 學問的(학문적)인 助力(조력), 自由人間(자유인간)을 信仰的(신앙적)으로 思想的(사상적)으로 認識(인식)케한 ‘카토릭’의 敎會精神(교회정신) 等等(등등)이 그 社會(사회)를 바로잡은 基本要素(기본요소)들이 되어 戰後(전후) ‘마샬·플랜’의 테두리안에서 10億弗(억불)의 利子(이자)없는 援助額(원조액)으로써 파괴된 그 業界(업계)를 再建(재건)하고 生活安定後(생활안정후)의 이 나라의 유달리 오랜 傳統(전통)을 가진 學問活動(학문활동)에로 눈을 돌려보자 Wiien大學(대학)이 設立(설립)된 600年前(년전)(1365年(년)에 세워졌음) 墺地利(오지리)를 Land der sehoenen Kuenste(藝術(예술)의 나라)로 온 世界(세계)에 알린 이 首都(수도) Vienna는 假令(가령) Berlin의 都市印象(도시인상)을 Lebhabt라고 하고 London을 trueb라고 指稱(지칭)한다면 wien을 Gemd etlich한 文化都市(문화도시)라고 일컬은 말은 旅行者(여행자)들의 象徵的(상징적)인 定平(정평)이다. 겨울이면 흔히 초록색 오-바를 입고 (北獨人(북독인)이 墺國人(오국인)을 가리켜〃짚씨-〃에 가까운 〃村(촌)놈〃이라고 함)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듯한 낡은 가방 안에 몇 卷(권)의 冊(책)과 Margarin Brot (ButterBrot가 비싸다고 않먹음) 몇 쪽을 넣고 Gruess Dich Ich hab seillg라는 말로 路上(노상)에서 만나는 親舊(친구)들과 握手(악수)만을 바삐 하고 學校(학교)로 다름질 치는 어린 大學生(대학생)들을 보면 더러 밉기도 하지만 어이보면 우리말로 정말 新通(신통)하기만 하다. 그러면 여기서 暫間(잠간) 墺國(오국)의 學制(학제)를 다루어보자. 元來(원래) 獨墺(독오)의 學制(학제)는 地方學校(지방학교)에 따라 若干(약간)의 差異(차이)는 있지만 大同小異(대동소이)한데 wien의 例(예)는 大略(대략) 다음과 같다. 小學(소학)8年(년)(中高校進學者(중고교진학자)는 小學四年(소학사년)을 마치고 中學一年(중학일년)에 入學(입학)한다.)에 高等科3年(고등과3년) 그리고 그 후는 二年(이년)의 職業學校(직업학교)(이 期間(기간)은 대개 어느 職場(직장)에 가서 Apprentice를 하면서 夜間學校(야간학교)에 감)를 마치고 職業人(직업인)이 된다.

學校行政(학교행정)은 敎授陣(교수진)과는 完全(완전)히 獨立(독립)되어있어 學問硏究(학문연구)엔 온전한 Acedemische Freiheit가 保障(보장)되어있다.

入學門(입학문)이 넓고 (內國人(내국인)은 高校卒業者(고교졸업자)로써 어느 大學(대학)에나 入籍(입적)할 수 있고 外國人(외국인)은 入學(입학)에 앞서 語學(어학)과 若干(약간)의 專攻科(전공과)에 對(대)한 試驗(시험)을 쳐야함) 卒業門(졸업문)이 좁은 獨墺獨特(독오독특)의 自由主義的(자유주의적)인 敎育制度(교육제도)는 修學過程(수학과정)이 一律的(일률적)인 學校行政中心(학교행정중심)이 되어있는 英美式(영미식)의 敎育制度(교육제도)와는 特異(특이)한데가 있다. 다른 말로 比較(비교)해본다면 同期生(동기생)들의 入學(입학)과 卒業(졸업)이 同一(동일)한 英美式(영미식)의 制度(제도)를 大量生産(대량생산)이라고 한다면 獨墺式(독오식)의 指導敎授(지도교수)를 中心(중심)한 卒業生輩出(졸업생배출)을 少量生産(소량생산)이라 할 수 있다. 그럼 여기서 暫間(잠간) 獨墺(독오)의 敎授陣(교수진)을 돌아보자 Ph.D.를 끝낸 學生中(학생중) 優秀(우수)한 者(자)가 助手(조수)(Assistant)가 되는데 (이 助手(조수)<Assistant>밑에 Ph.D.를 마친 者(자)나 거의 卒業(졸업)이 되어가는 優秀(우수)한 者(자)들이 갖는 Eissenschaftliche Hiljskraft(補助手(보조수))라는 地位(지위)가 있음) 이 助手(조수)(Assistant)들에겐 Habilitation을 (大學講師(대학강사)로써 資格(자격)을 얻는 것)하기 까지 8年間(년간)의 期間(기간)이 附與(부여)되어있다.

(이 8年間(년간)에 Habilitation을 못하는 助手(조수)는 그 자리를 떠나야함) 그런바에 이 8年間(년간)을 助手(조수)들은 두 세 名(명) 敎授(교수)들의 學問的補助(학문적보조)를 專擔(전담)하며 各硏究所間(각연구소간)의 學問硏究(학문연구)에 隨伴(수반)된 硏究所行政(연구소행정)도 맡고서 自己指導敎授(자기지도교수)밑에서 Habilitionsschrift를 쓴다.

Habilitation에 세 段階(단계)가 있다.

⓵Habilitationsschrift(資格(자격)을 얻기 爲(위)한 論文(논문))

⓶Kolloiium(普通(보통)20餘名(여명)의 敎授(교수)들이 共同口試(공동구시)를함)

⓷Antrittsvorlesung(講師(강사)로써의 첫 講義(강의))

이 세 가지에 合格(합격)함으로써 그들은 大學講師(대학강사)로써 그 社會(사회)에서 學者待遇(학자대우)를 받기 始作(시작)한다. 나 自身(자신) Ph.D.는 大端(대단)하게 生覺(생각)않지만 이 Habilitationsystem은 높이 評價(평가)하는 바인데 우리나라도 不遠(불원)한 將來(장래)에 이 制度(제도)를 施行(시행)함이 國家萬年大計(국가만년대계)를 바탕하는 學園(학원)에의 秩序確立(질서확립)과 淨化(정화)를 爲(위)해 妙策(묘책)이 아닌가 生覺(생각)한다.

다음으로 學生(학생)들의 就學狀態(취학상태)를 보면 다음과 같다.

學期認定(학기인정)을 爲(위)한 所要時間(소요시간)이 15時間(시간) 以上(이상)인데 (일주

(일주)에 15時間(시간)의 受講申請(수강신청)을 해야함) 普通(보통)20-25時間(시간) 申請(신청)을 하여 專攻科(전공과)에 對(대)한 徹底敎育(철저교육)을 講義(강의)보담 쎄미나를 通(통)해 獎勵習得(장려습득)시킨다. (한 學期(학기)에 두가지 以上(이상) 세미나르에 參席(참석) 못함) 그래서 많은 學生(학생)들의 平時就學狀況(평시취학상황)은 세미나를 爲(위)한 레포트 準備(준비)가 各自(각자)의 趣味(취미)에 따라 讀書(독서)를 하고 學期末(학기말)이나 學年末(학년말)에 際(제)하면 講義(강의)를 中心(중심)한 노트나 敎授(교수)들이 推薦(추천)한 參考書籍(참고서적)들을 利用(이용)하며 Kollojium(試驗(시험)은 筆記試驗(필기시험)보담 口試(구시)가 많이 치러진다) 準備(준비)를 한다. 이래서 平素(평소)의 逸勞態度(일로태도)가 全般的(전반적)으로 熱心(열심)인 反面(반면)에 試驗期(시험기)를 除外(제외)하곤 거이 每週末男女學生(매주말남녀학생)들이 몇몇이서 逍風(소풍)들을 다니고 또는 音樂會(음악회)나 ‘오페라’를 다니곤 하는 것을 보면 그 애들은 衣食(의식)을 아껴서 學生時節(학생시절)의 情緖生活(정서생활)도 할줄 아는 애들이기도 하다. 이 外(외)에도 그곳엔 많은 半學問的(반학문적)인 硏究所(연구소)와 學生團體(학생단체)에서 周旋(주선)하는 講演(강연)이 많아서 關心(관심)있는 學生(학생)들이면 每日(매일)밤 어느 講演(강연)에라도 가서 學問的(학문적)인 社會的(사회적)인 問題(문제)에 對(대)해 討論(토론)을 하고 識見(식견)을 넓힐 수 있다. 한편 學校側(학교측)에선 많은 國際的(국제적)인 獎學機關(장학기관)들과 連絡(연락)해서 優秀(우수)한 學生(학생)들의 就學(취학)을 정말 國際的(국제적)으로 推獎(추장)하며, 交換敎授活動(교환교수활동)을 圓滑(원활)케 하며 이 學問硏究(학문연구)라는 것을 정말 International하게 相互連結(상호연결)시킨다. 學者生活(학자생활)을 보면 大部分(대부분)의 敎授(교수)가 一週(일주) 五-六時間(오-육시간)을 맡고 (第一(제일)많은 敎授(교수)가 講義(강의) 두 科目(과목)과 쎄미나를 一科目(일과목)을 맡음, 其他(기타)는 大部分講義(대부분강의) 一科目(일과목)과 쎄미나를 한 科目(과목)) 其他時間(기타시간)을 보낸다.

博認傍證(박인방증)하는 獨逸傾學(독일경학)들의 如上(여상)한 活動(활동)은 數世紀間(수세기간)을 쌓아온 學問的傳統(학문적전통)과 또는 오늘 現實(현실)의 社會的安定(사회적안정)의 所産(소산)이기에 당장에 그네들처럼 學問活動(학문활동)을 할 수 없는 우리들에게는 社會環境(사회환경)이 許諾(허락)치를 않아 알면서도 行(행)할 수 없는 한낫 理想(이상)에 不過(불과)한 일이지만, 우리 爲政者(위정자)들의 〃國民性(국민성)의 相違(상위)〃가 社會(사회)와 敎育(교육)에서 온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낀다면 遠視眼的見地(원시안적견지)에서 국민을 우선 배불리 먹이려하는 政策(정책) 못지않게 健全(건전)한 敎育政策(교육정책)을 세워야 할 것이며 圓滑(원활)한 國際文化交流(국제문화교류)를 通(통)해 政治的經濟難問題解決(정치적경제난문제해결)을 模索(모색)함이 우리나라 民主化(민주화)에 堅實(견실)한 길이 아닌가 生覺(생각)한다. (글쓴이·哲學博士(철학박사)·文理大專任講師(문리대전임강사))

 

特(특)히 日本早大(일본조대)의 境遇( 경우)

野人(야인)의 氣魄(기백)

金在滿(김재만)

早大(조대)는 私學(사학)의 殿堂(전당)

早·慶戰(조·경전)엔 大學街(대학가)의 商人(상인)도 聲援(성원)

 

明治(명치)·大正年間(대정년간)의 巨物級政治家(거물급정치가) 大限重臣伯爵(대한중신백작)은 一八八二年(일팔팔이년)에 早稻田大學(조도전대학)의 前身(전신)인 東京專門學校(동경전문학교)를 創設(창설)하였다. 그는 明治政府(명치정부)의 官僚機關(관료기관)인 東京大學(동경대학)에 對(대)하여 私立學校(사립학교)를 設立(설립)하고 獨立(독립)·自由(자유)스러운 人格(인격)을 갖추면 批判的(비판적) 精神(정신)을 갖는 사람들을 敎育(교육)하고자 한 것이다. 建學(건학)의 意義(의의)가 學問(학문)의 獨立(독립)과 自由(자유)의 精神(정신)에 있음을 强調(강조)하는 早大(조대)는 “官學(관학)아카데미”로부터 獨立(독립)하여 自由(자유)스러운 學問的(학문적) 姿勢(자세)를 지키며, “學問(학문)의 獨立(독립)”·“實用敎育(실용교육)” “模範的國民(모범적국민)의 養成(양성)”을 基本方針(기본방침)으로 하는 것을 明白(명백)히 大學敎旨(대학교지)에서 밝히고 있다. 官學(관학)에 對(대)한 私學(사학)의 設立(설립)이였기에 “野人(야인)의 氣魄(기백)”을 “못토”로 하고 그 無實力行(무실력행)에 한눈을 팔지 않는다.

이러한 建學精神下(건학정신하)에 八○年(팔공년)을 發展(발전)하여서 日本社會(일본사회)에 있어서 官(관)에 東大(동대)를 이를테면 私(사)에 早大(조대)를 들어야할 만큼 巨大(거대)한 學府(학부)가 完成(완성)된 것이다.

滄空(창공)에 聳立(용립)하는 大講堂(대강당)의 時計塔(시계탑)에서는 時間(시간)마다 은은한 ‘촤임’이 열한번씩 울리어퍼져서 넓은 캠퍼스에 어제와 오늘을 속삭여준다. 早大(조대)에 留學中(유학중)인 外國學生(외국학생)들은 그 ‘촤임’속에 멀리 故國(고국)땅의 父母兄弟(부모형제)를 그리어 본다. 많은 學生(학생)들은 多情(다정)하게 가까워 오는 그 音波(음파) 속에 사랑하는 이의 呼吸(호흡)을 느낀다.

그리고 自身(자신)있는 未來(미래)의 抱負(포부)를 하나 하나 가슴에 담아본다. 時計塔(시계탑)의 ‘촤임’은 大(대)캠퍼스의 아름다운 ‘로맨티시즘’을 낳고 기르고 그것을 거두기까지도 한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며 遙遙(요요)한 玄海灘(현해탄) 넘어로부터 情(정)다웁게 울려오는 ‘촤임’소리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그만치 그곳에 살은 일이 있는 사람에게는 時計塔(시계탑)의 鍾(종)소리가 印象(인상) 깊이 腦裡(뇌리)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表面的(표면적)인 早大(조대)의 生活(생활)에 있어서는 時計塔(시계탑)이 指導塔(지도탑)의 役割(역할)을 한다. 時計塔(시계탑)이 움직이는 것을 따라서 表面的(표면적)인 早大(조대)는 발맞추어 걸어간다. 圖書館(도서관)이 八時(팔시)의 ‘촤임’소리에 第一着(제일착)으로 大門(대문)을 활짝 연다. 그래서 밤 十時(십시)까지 繼續勤務(계속근무)를 한다. 이 十四時間(십사시간) 사이에 數千(수천)을 헤아리는 學生(학생)들이 圖書館門(도서관문)을 드나든다. 六○餘萬(육공여만)의 藏書(장서)(八(팔)·九年前(구년전) 내가 在學當時(재학당시))가 알고파 몸부림치는 學生(학생)들 앞에 흐뭇한 벗이 되어 준다. 圖書館(도서관)에 이어서 大學本部(대학본부)의 事務室(사무실)들이 門(문)을 열고 各學部(각학부)(우리의 大學(대학))와 大學院(대학원)이 開場(개장)한다. 大學院(대학원)의 講議(강의)시작이 十時(십시)이니 午前十時(오전십시)에는 全學校(전학교)에 總開店(총개점)을 하는 셈이다.

早大(조대)를 中心(중심)으로한 大學街(대학가)도 첫 새벽부터 분주하다. 飮食店(음식점)들은 아침밥을 買食(매식)하는 學生(학생)들을 爲(위)하여 어두운 거리에 ‘노렝’(店鋪(점포)의 看板(간판)같은 것)을 내걸어야하며, 書店(서점)들은 登校(등교)하는 學生(학생)들의 지갑 앞에 陳列欌(진열장)을 露出(노출)시켜야하며, 棋院(기원), 麻雀(마작)집들은 게으름뱅이 學生(학생)들의 발걸음을 誘引(유인)하기 爲(위)하여 어두운 방의 커텐을 걷어 올려야 한다. 아침일찌기 大學街(대학가)에 들어서서 물밀리듯 움직이는 學生(학생)들 사이에 끼어 걷고 있노라면, 登校途中(등교도중)에 밥을 사먹고 있는 사람, 書店(서점)에서 흥정을 하고 있는 사람이 左右(좌우)로 들여다 보이는 사이에, 性急(성급)한 바둑 愛好家(애호가)들이 上學途中(상학도중)에 暫時(잠시)의 外道(외도)를 즐기고 있는 風景(풍경)이 조금도 어색함이 없이 바라다 보인다.

어느 執拗派(집요파)들은 終日(종일) 바둑판과 눈씨름을 하며 人生觀(인생관), 倫理觀(윤리관), 靑春觀(청춘관), 戀愛觀(연애관)을 즐겨 이야기 한다니 거기에 浪漫(낭만)이 있고 애교

(애교)가 있고 삶의 餘裕(여유)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麻雀愛好家(마작애호가)도 매일 반이다.

캠퍼스에 들어서서 對(대)하는 學生(학생)들은 퍽 純眞(순진)하여보인다. 學問(학문)을 爲(위)하여 學校(학교)를 찾은 젊은이들의 냄새가 눈에, 입에 가득하다. 서로 交換(교환)하는 對話(대화)는 거의 다 學問(학문)의 이야기이고 學生(학생)의 이야기이다. 政治(정치)가 어떻고, 立候補(입후보)가 어떻고…. 이런 이야기가 그들 對話(대화)의 主題(주제)가 되어있는 것 같이 느끼어 지지는 않는다. 學園內(학원내)의 總會長選擧(총회장선거)가 어떻고, 學會長立候補(학회장입후보)가 어떻고 따위의 일들을 나는 全然(전연) 알지 못한체 前後午年間(전후오년간)의 大學院硏究生活(대학원연구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돈을 뿌리고, 돈을 먹고, 날치기 감투에 날치기 벼락까지 橫行(횡행)하는 일들은 적어도 早大(조대)의 學生社會(학생사회)에는 없었던 것을 나는 안다.

나는 얼마 前(전)에 日本(일본)의 商人(상인)들이 祖上傳來(조상전래)의 傳統(전통)을 貴(귀)히 지키고 있는 몇가지 이야기를 紹介(소개)한바 있었는데 學校(학교) 또한 그 傳統意識(전통의식)이 比(비)할데 없이 强(강)하다. 學生(학생)들은 그 學校(학교)의 검게 반짝이는 傳統(전통)을 고이 모시고 스스로의 存在(존재)가 앞날을 爲(위)하여 그 傳統(전통)위에 또 하나의 빛이 되게 하기 爲(위)하여 愼重(신중)히 그리고 차근 차근 걸어가고 있다. 戰後(전후) 全世界(전세계)를 휩쓸은 ‘아푸래겔’思想(사상)이 가장 멋있게 日本社會(일본사회)에 蔓延(만연)하였던 것은 有名(유명)한 이야기 이고, 唯獨(유독) 學園(학원)만이 除外(제외)될 수는 없었던 現象(현상)이었으나, 大部分(대부분)의 學生(학생)들은 그것을 조용히 맞이하고 그렇게 보내었다. 발디딜 곳만 있으면 온 몸을 비비꼬며 鬼神(귀신)의 잠꼬대같은 奇聲(기성)·狂言(광언)을 發(발)하는 ‘비트’族(족)의 亂舞(난무)도 캠퍼스를 오가는 學生(학생)들과는 因緣(인연)이 먼 風景(풍경)이었다.

講義時間(강의시간)에는 敎授(교수)의 講論(강론)에 耳目(이목)을 모우고 休息時間(휴식시간)에는 學生(학생)홀에서 牛乳(우유)나 茶菓(다과)를 나누며 T·V의 冶具中繼等(야구중계등)을 즐겨보는 學生(학생)들, 그리고 틈이 있으면 圖書館(도서관)을 찾는 學生(학생)들의 줄이 길게 길게 이어 나가는 동안 早大(조대)는 80年(년)의 傳統(전통)에 辱(욕)되지 않는 새 싻을 심고 단을 거두며 자랑스러운 어제의 傳統(전통)에 來日(내일)의 榮光(영광)을 添加(첨가)할 수 있을 것이다.

煙花ㅇ開(연화ㅇ개)하는 봄에, 綠陰芳草(녹음방초) 물이 흐르듯 하는 여름에, 뭇새들이 霜葉(상엽)에 잠자는 가을에 早大(조대)의 캠퍼스에 들어서면, 萬苦(만고)의 眞理(진리가 살아 있고, 생생한 學問(학문)이 용솟음치고 있는, 그야말로 文化(문화)의 小中心地(소중심지)를 밞은 氣分(기분)에 마음이 흐뭇하여지곤 한다.

1年(년)에 새번 早大學生(조대학생)들은 그들의 靑春(청춘)을 마음껏 發散(발산)하는 때가 있다. 春秋(춘추)로 있는 早·慶戰(조·경전) (早大(조대)와 慶大(경대)의 冶具試合(야구시합))때와 가을의 大學祭(대학제)때이다. 早慶戰(조경전)은 비단 兩校(양교)의 大事(대사)일 뿐만 아니라 日本全國(일본전국)의 ‘팬’을 興奮(흥분)시키는 大球宴(대구연)인 것이다. 兩校(양교)는 勿論(물론) 試合時(시합시)에 全科目(전과목) 休講(휴강)을 하고 試合當日(시합당일) 學生(학생)들이 大學(대학) 應援戰(응원전)에 參加(참가)하여 氣勢(기세)를 올리는 것은 他(타)에서 볼 수 없는 壯觀(장관)이다. 早慶戰(조경전)은 應援戰(응원전)이 더 볼만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만치 兩校(양교)의 應援(응원)은 大大的(대대적)인 것이다. 應援(응원)에 나서는 것은 學生(학생)들 뿐이 아니다. 早·慶兩校(조·경양교)가 位置(위치)하고 있는 學校街(학교가)의 商人(상인)들도 應援團(응원단)을 組織(조직)하여 猛烈(맹렬)한 聲援(성원)을 보낸다. 試合(시합)이 끝난 後(후) 진편은 진대로, 이긴편은 이긴대로, 早大(조대)는 新宿(신숙)으로 나가고 慶大(경대)는 銀座(은좌)로 나가서 校歌(교가)를 부르면서 거리를 휩쓴다. 술집마다 學生(학생)들이 들어차서 角帽(각모)가 나르고, 노래가 춤춘다. 新宿繁華街(신숙번화가)의 사거리에는 스크람을 짠 早大(조대) 學生(학생)들이 노래하며 춤을 추며 限(한)없이 돌고 돈다. 天下(천하)가 내것이고 眼下無人(안하무인)이다. 市民(시민)들은 이 學生(학생)들의 靑春亂舞(청춘난무)에 祝賀(축하)의 拍手(박수)를 보내여 준다. 警察官(경찰관)도 한구석에 비켜서서 靑春發散(청춘발산)을 保護(보호)하여 준다. 밤 十二時(십이시)·一時(일시)·二時(이시)가 되어도 學生(학생)들은 집에 돌아가는 것을 잊은 사라믈 같이 醉(취)하여 노래를 부른다. 참된 平和(평화)와 멋있는 自由(자유)가 學生(학생)들의 靑春(청춘)과 더불어 노는 즐거운 風景(풍경)이다. 學生(학생)들은 그러나 끝내 理性(이성)을 잊어버리는 放蕩兒(방탕아)들이 되지는 않는다. 날이 새면 다시 으젓한 角帽(각모)를 쓴 學生(학생)이고 硏究室(연구실)에서 圖書館(도서관)에서, 書籍(서적) 옆에 恭遜(공손)한 배움의 아이들이 되는 것이다. 大學祭(대학제)때로 學生(학생)들은 四肢(사지)가 달아나라고 亂舞(난무)한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면 다시 고요한 眞理(진리)의 探究者(탐구자)가 되니 이것이 “野人(야인)의 氣魄(기백)”을 자랑삼고 사는 “와새다맨”의 氣質(기질)인지도 모른다.(글쓴이·韓國史學會(한국사학회) 常任編輯委員(상임편집위원)·文理大講師(문리대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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