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開校紀念日(개교기념일)을 보내고-

(一(일)) 大學(대학)의 地位(지위)

社會(사회)에서 大學(대학)에 마낀 最小限(최소한)의 구실은 敎養人(교양인), 專門家(전문가), 및 學者(학자)를 양성하느데 있다. 이것은 大學(대학)이 하여야할 일 중에서 결코 除外(제외)시킬 수 없는 課業(과업)이다. 大學(대학)이 社會(사회)의 知性(지성)으로서 不斷(부단)히 새롭고 有益(유익)한 眞理(진리)를 발겨서 社會福祉(사회복지)의 增進(증진)에 이바지하고 社會進步(사회진보)에 動力(동력)을 提供(제공)하며 또 民族(민족)의 良心(양심)으로서 執權層(집권층)이나 社會(사회)의 有力層(유력층)의 壓力(압력)에 겁내지 않고 正當(정당)한 批判(비판)과 助言(조언)을 아끼지 않으므로서 밝은 傳統(전통)과 바른 氣風(기풍)을 社會(사회)에 진작시키는 것이 참으로 大學(대학)의 大學(대학)다운 姿勢(자세)일 것이다. 韓國(한국)의 大學(대학)의 歷史(역사)는 어리니만치 그 傳統(전통)이나 자랑이 많지는 못하지만 不義(불의)에 대하여 民族(민족)의 良心(양심)으로서 피의 證言(증언)을 하였던 것이 어제의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의 大學(대학)은 어디로가고 있는가. 大學(대학)이 그 最小限(최소한)의 구실인 敎養人(교양인), 專門家(전문가) 및 學者(학자)를 옳게 키워서 社會(사회)에 進出(진출)시키고 있는가. 또 社會(사회)는 大學(대학)에서 每年(매년) 배출되는 젊은 일꾼을 어떻게 처우하고 있는가. 우리는 유감스럽지만 嚴重(엄중)한 現實(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러내놓고 自己(자기)를 돌아보아야겠다.

오늘날 우리 社會(사회)의 實情(실정)으로 보건데 大學(대학)에서 學問的雰圍氣(학문적분위기)에 젖은 生活(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떤 점으로 보든지 선택함을 받은 것을 意味(의미)한다. 國民所得(국민소득)이 一人當(일인당) 八○弗(팔공불)도 못되는 貧困(빈곤)의 멍에를 짊어지고 있는 韓國(한국)의 現實(현실)에서 大學生活(대학생활)이란 自己個人本位(자기개인본위)로만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가난한 동포에게 血債(혈채)를 지고 있는 것이며 이 血債(혈채)를 갚는 길은 우리 社會(사회)의 進步發展(진보발전)에 直接(직접) 또는 間接(간접)의 거름이 되는 것이다. 똑같은 젊은 이로서 주위의 條件(조건)이 허락지 않기 때문에 大學(대학)에서 배울 수 있는 機會(기회)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할 때에, 또 우리 社會(사회)와 같이 貧困(빈곤)에 멍든 社會(사회)에서 大學(대학)이 처한 位置(위치)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大學生活(대학생활)에서 使命感(사명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우리의 社會現實(사회현실)은 어떠한가. 그것은 不條理(부조리)와 矛盾(모순)에 뒤얽혀있다.

每年(매년) 배출되는 大學卒業生(대학졸업생)에게 반가히 마지하여주는 일터가 없고 自己(자기)의 才能(재능)을 발휘할 마땅한 職場(직장)이 나서지 않는다. 또 社會(사회)는 大學卒業生(대학졸업생)을 아직도 疑問(의문)과 不安(불안)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으며 그들의 正當(정당)한 能力(능력)을 評價(평가)하기에 앞서서 未熟性(미숙성)과 不足點(부족점)을 들추어보고 舊世代的(구세대적) 基準(기준)에 맞추어서 批判(비판)한다. 그러나 이렇나 것도 큰 問題(문제)는 아니다. 問題(문제)는 社會(사회)가 正當(정당)한 能力(능력)발휘와 젊은 일꾼을 수용하는데 失敗(실패)하고 있으며 또 이러한 矛盾(모순)은 젊은 知性(지성)들이 앞장서서 두드려 부셔야 한다는 점이다.

 

(二(이)) 失意(실의)의 知性(지성)으로 좌절될 것인가

우리 社會(사회)와 같이 할 일 많은 社會(사회)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社會(사회)와 같이 일꾼이 놀아야하는 社會(사회)도 또한 없을 것이다. 貧困(빈곤) 속에 시드는 백성에게 貧困(빈곤)이 宿命(숙명)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서 땀흘려 보람찬 來日(내일)을 約束(약속)하며 일하여야할 우리에게 學生(학생일수록 일자리가 없고 또 高等(고등) 룸펜化(화)가 하나의 社會風潮(사회풍조)로 되고 있고 젊은이들을 非生産的(비생산적)인 일에 얽메이게 한다. 이러한 非正常的(비정상적) 事態(사태)는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 없다.

“그것은 亡國(망국)에의 길이다”

우리가 알면서도 亡國(망국)에의 길을 줄달음 칠 수는 없다.

社會(사회)에서 自己(자기)의 正當(정당)한 位置(위치)가 주어지지 않어서 失意(실의)의 知性(지성)으로 좌절되는 무서운 現實(현실-. 이러한 現實(현실)은 超克(초극)되어야 한다. 知性(지성)이 失意(실의) 속에 시들어 버려서는 안된다. 젊은 知性(지성)은 주위의 조고만 일부터 시작하여 歷史(역사)를 추구하는 물결에 뛰어 들어야한다.

社會(사회)에서 ‘셀라리’를 받고 職名(직명)이 붙은 자리에서 일을 하는 것만이 일은 아니다. 茶房(차방)에서 期約(기약)없는 ‘셀라리’의 地位(지위)를 期待(기대)하면서 허송세월하는 것이 젊은 知性(지성)의 姿勢(자세)는 아니다. 내 고장- 가난한 내 고향에서 貧困(빈곤)과 싸우는 조그마한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땀을 흘리는 것이 얼마나 보람찬 일인가? 가난으로 義務敎育(의무교육)조차 못받는 어린이에게 눈을 뜨여주고 無知(무지)의 罪(죄)로 비참하여야하는 兄弟(형제)들에게 등불이 되는 것은 값싼 政治人(정치인)보다 얼마나 우리 社會(사회)의 보배인가? 大學(대학)에서 배운 農業(농업)에 관한 學理(학리)를 兄弟(형제)들과 함께 實際(실제)에 응용하는 것은 의자에 편히 앉어서 退勤時間(퇴근시간)을 기다리는 ‘셀라리맨’보다 얼마나 더 有益(유익)한 일안가?

젊은 知性(지성)들은 社會(사회)에서 自己(자기)들에게 일자리를 주길 바라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우리 社會(사회)를 福(복)되게 하기 爲(위)한 일거리를 스스로 마련하므로서 우리 社會(사회)의 고질화된 矛盾(모순)에 挑戰(도전)하여야겠다.

젊은 知性(지성)들은 民衆(민중)속으로 뛰어들어 그들속에서 보람찬 일을 할 수 있는 아량과 使命感(사명감)이 있어야만 우리의 宿命的貧困(숙명적빈곤)을 打破(타파)하고 近代化(근대화)된 社會(사회)에서 살아서 福(복)된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 官廳(관청)의 데스크에 자리잡은 同僚(동료)들을 부러워하는 安易(안이)한 態度(태도)를 우리의 現實(현실)은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우리 社會(사회)는 그러한 安易(안이)함을 許容(허용)하기에는 實情(실정)이 너무나 嚴重(엄중)하다.

 

(三(삼)) 大學(대학)의 할 일은 무엇인가?

大學(대학)은 우리 社會(사회)의 矛盾(모순)에 挑戰(도전)하여 社會(사회) 近代化(근대화)의 進步(진보)에 헌신하는 課業(과업)을 양어깨에 진 젊은 知性(지성)을 양성, 배출시키는 其他(시타)이여야한다. 先進諸國(선진제국)에 比(비)하여 여러 가지 惡條件(악조건)에 시달려야하는 韓國(한국)의 大學(대학)이지만 先進諸國(선진제국)의 大學(대학)보다 더 크고 심각한 責務(책무)가 부과되고 있는 것이 또한 韓國(한국)의 大學(대학)이다. 韓國(한국)의 大學(대학)은 不正(부정)에 얽힌 社會(사회)에서 良心(양심)의 證言者(증언자)가 되어야하고 知性(지성)의 燈台(등대)가 되어야 한다. 先進諸國(선진제국)의 大學(대학)과 달리 그 傳統(전통)이나 施設(시설)이 不足(부족)한 것이 韓國(한국)의 大學(대학)이지만 民族(민족)의 知性(지성)으로서 民族(민족)과 함께 올바른 傳統(전통)을 세우면서 民族(민족)의 품에서 國民大衆(국민대중)이 아껴주는 大學(대학)으로 자라나야겠다.

우리의 大學(대학)이 이렇게 發展(발전)하자면 民族的(민족적) 使命(사명)과 참된 意味(의미)에서의 愛族(애족)의 情熱(정열)이 들끓어야 한다. 또한 大學內(대학내)의 氣風(기풍)이 참신하고 진지하여야겠고 大學(대학)의 構成員(구성원) 스스로 自己充實(자기충실)의 姿勢(자세)를 갖추어야겠다. 大學(대학)은 不足(부족)되니는 施設(시설)일지라도 最大限(최대한)으로 效用(효용)하고 어떻게 하면 社會(사회)에 ‘써비스’할 것인가 하는 것을 항상 念頭(염두)에 두고 大學本然(대학본연)의 位置(위치)에 서서 自己改革(자기개혁)에 과감하여야겠다.

大學卒業生(대학졸업생)이 보다 많이 배출되어 韓國(한국)의 近代化(근대화)와 進步發展(진보발전)에 이바지할 일꾼이 많아지게 되어야한다. 大學卒業生(대학졸업생)이 많아서 就職(취직)의 門(문)이 좁아진다는 오늘의 逆說的(역설적) 現實(현실)을 超克(초극)하여 大學(대학)에서 나오는 젊은 知性(지성)은 社會各分野(사회각분야)에서 제구실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與件(여건)의 造成(조성)은 使命感(사명감)에 충만한 情熱(정열)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독일이 外敵(외적)의 말발굽에 짓밟힐 때에 ‘독일 國民(국민)에게 告(고)함’이라는 講演(강연)으로 독일의 知性(지성)을 일깨운 哲學者(철학자)‘피히테’의 使命感(사명감)에 충만한 情熱(정열)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우리의 大學社會(대학사회)에서도 새로운 氣風(기풍)이 진작되어 民族(민족)의 장래를 위한 젊은 知性(지성)들의 陣痛期(진통기)를 마련하여야겠다.

大學(대학)이 學問(학문)하는 곳이라는 것은 어길 수 없는 事實(사실)이다. 그런데 學問(학문)은 民族(민족)의 運命(운명)과 社會(사회)의 發展(발전)이란 문제와 동떨어져서 생각할 수는 없고 學問(학문)이 學問(학문)을 위한 學問(학문)으로 그칠 수는 없다. 누구를 위한 學問(학문)이며 무엇을 하려는 學問(학문)인가의 바른 姿勢(자세)를 確立(확립)하여 참된 民族(민족)의 知性(지성)을 밝히는 學問(학문)이 되어야겠다.

아마도 오늘날과 같이 韓國(한국)의 大學(대학)에 부과된 責務(책무)가 重且大(중차대)하였던 時期(시기)는 없을 것이다. 이때야 말로 우리는 大學(대학)의 참된 얼을 일깨워야겠다. 우리 社會(사회)가 大學(대학)에게 부과한 責務(책무)를 正當(정당)히 수행하기 위하여 大學(대학)의 精神(정신)을 일깨워야하겠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