總長(총장) 金法麟(김법린)

녹쓴 知性(지성)이 舊世代(구세대)다

社會發展(사회발전)에 適應(적응)해야

 

우리는 近來(근래)에 一世代(일세대)에 관한 論議(논의)가 활발히 展開(전개)되고 있음을 본다. 四·一九(사·일구) 以後(이후)에는 ‘旣成世代(기성세대)’라는 말이 젊은 知性人(지성인)으로부터 경멸적인 意味(의미)로 使用(사용)되었고 또 五·一六(오·일육) 以後(이후)에는 ‘世代交替(세대교체)’의 論爭(논쟁)이 대두되었다. 여기서 使用(사용)된 世代(세대)라는 말의 뉴앙스가 복잡한 바 있으나 이 問題(문제)는 政治的意味(정치적의미)를 넘어서 眞摯(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먼저 우리는 여기서 世代(세대)라는 말이 반드시 年齡(연령)을 基準(기준)으로 하는 뜻이 아니라는 것은 새삼스럽게 再言(재언)할 必要(필요)도 없을 것이다. 問題(문제)는 時代(시대)의 發展(발전)과 社會(사회)의 進步(진보)에 適應(적응)할 수 없는 者(자)가 바로 낡은 世代(세대)라는 것이다.

前近代的(전근대적)인 價値基準(가치기준)에서 事物(사물)을 判斷(판단)하려고 고집하므로서 時代(시대)의 발전하는 물결에 거슬러 올라가려고 발버둥질치고 또는 自己(자기)의 無用之物化(무용지물화)된 能力(능력) 아닌 能力(능력)이 無價値(무가치)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자라나는 後進(후진)을 가로막으려고 自己(자기)대로의 졸열한 구실을 마련하려고 애쓰는 것이 참으로 舊世代(구세대)로 낙인이 찍힐 것이다.

우리는 社會(사회)에서 구태여 ‘新世代(신세대)이다’ ‘舊世代(구세대)이다’하고 서로가 갈라서서 싸울 필요는 없고 또 그래서는 아니된다. 그러나 社會(사회)의 發展(발전)과 時代(시대)의 趨勢(추세)에 外面(외면)하고 자라나는 世代(세대)를 시기와 두려움으로 敵對視(적대시)하고 그들의 正當(정당)한 發言(발언)과 主張(주장)을 默殺(묵살)하려고 드는 것은 그대로 坐視(좌시)할 理由(이유)는 없다. 어떤 社會(사회)이고 급격한 變動期(변동기)에 直面(직면)하여서는 새로운 社會現實(사회현실)에서 無能化(무능화)되는 人物(인물)들이 自己(자기)의 旣得權(기득권)에 매달려서 바르고 참된 싻을 헐뜯고 나아가서 反動的(반동적)인 作用(작용)을 加(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社會(사회)의 거센 물결의 흐름을 되돌려 놓을 수는 결코 없다.

우리는 먼저 스스로가 어느 世代(세대)에 속하느냐는 自問(자문)하기 前(전)에 어찌하여 우리 社會(사회)에서 ‘世代(세대)’ 論爭(논쟁)이 發生(발생)하였으며 또 이것이 끈덕지게 계속하여 우리의 關心(관심)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가 하는 것을 한번쯤은 냉정하게 생각하여 볼 必要(필요)가 있다고 본다.

周知(주지)하는 바와같이 ‘世代(세대)’라는 말은 旣成指導層(기성지도층)의 無能(무능)과 腐敗(부패)에 대한 반발에서 싻이 튼 것이다. 젊은 後輩(후배)는 늙은 先輩(선배)를 마음 속에서 공경할 수 없고 또 先輩(선배)가 後輩(후배)를 참뜻에서 아끼고 키울 마음가짐이 서지 않을 때에 거기에는 반드시 그 무슨 ‘갭’이 있는 것이다. 特(특)히 그것이 年齡(연령)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社會現象(사회현상)이라고 할때에 그것은 新陳代謝(신진대사)가 正常化(정상화)되지 못한 病理現象(병리현상)이 아니라고 斷定(단정)할 수 없는 심각한 社會問題(사회문제)이다. 더욱이 現지도층)이나 스스로 舊世代的(구세대적) 位置(위치)에서 新進(신진)들의 경솔과 無經驗(무경험)을 책망하는 人士(인사)들은 그들이 日帝(일제)의 植民地治下(식민지치하)에서 잔뼈가 굵었다는 事實(사실)을 看過(간과)하여서는 안된다.

우리 社會(사회)가 變動期(변동기)에서 發展(발전)과 後退(후퇴) 또는 停滯(정체)에서 방황하는 이때에 社會外界(사회외계)의 指導層(지도층)의 가장 큰 失策(실책)은 그들을 옳게 繼承(계승)하여서 發展(발전)의 ‘바톤’을 넘겨받을 後進(후진)들을 育成(육성)하여 놓지 못하였다는 點(점)이다. 解放後(해방후) 급격히 上層指導(상층지도)의 위치에 오르게 된 그들이므로 다른 社會(사회)의 指導層(지도층)에 比(비)하여 年少(연소)한 나이에 頂點(정점)에 오른 者(자)들이 많았다. 따라서 그들은 後進(후진)의 育成(육성)에는 너무나 關心(관심)이 박약하였다. 그러나 時代(시대)는 發展(발전)하고 後進(후진)은 輩出(배출)되고 있다.

自己(자기)의 位置(위치)가 아무리 自己(자기)의 個人的(개인적) 利害(이해)에 절실하다고 할지라도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서 社會(사회)의 發展(발전)에 適應(적응)할 能力(능력)이 없으면 그는 이미 그의 역할이 종말을 告(고)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오늘날 ‘舊世代(구세대)’라고 말하는 者(자)는 이러한 時代(시대)의 變動(변동)과 社會(사회)의 發展(발전)에 거슬려 오르려고 하는 녹슭 낡은 知性(지성)을 가진 者(자)들이다. 그들은 自己(자기)의 無能(무능)을 젊은이의 경솔로서 ‘카바’하고 自己(자기)의 權威(권위)를 참신한 知性(지성)에서가 아니라 젊은이의 無經驗(무경험)을 책하는 것으로 세우려하며 또 그들은 앞으로의 웅대한 設計(설계)와 現實(현실)의 革新(혁신)보다 現實(현실)의 固定(고정)과 過去(과거)의 낭만적 美化(미화)로서 代置(대치)시키려는 傾向(경향)이 있다. 젊은 世代(세대)의 進出(진출)을 積極的(적극적)으로 이끌어주지 않는 社會(사회)가 옳게 또 참되게 發展(발전)한다고 볼 수는 없다.

特(특)히 學園(학원)이라는 혜택받은 環境(환경)에서 民族(민족)의 運命(운명)을 걸머지고 硏學(연학)에 몰두하는 우리로서는 民族的(민족적)인 긍지와 使命(사명)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外部(외부)의 ‘舊世代(구세대)’的(적)인 아양과 유혹을 斷乎(단호)하게 물리치며 썩은 구정물에 구미를 도꾸지 말아야 겠다. 오늘의 젊은 이는 너무나 世上(세상)에 밝고 약삭 빠르다는 말을 듣는데 이것은 一般的(일반적)으로 該當(해당)되는 것은 결코 아니겠지만 反省(반성)하는 점이 있어야 할 줄로 한다. 만일 자라나며 배우는 젊은 知性(지성)이 녹쓸은 知性(지성)의 目前(목전)의 去來(거래)의 對象(대상)이 되고 ‘룰’을 망각하고 스스로의 位置(위치)를 超越(초월)하여 行動(행동)한다면 그것이 바로 ‘녹쓸은·知性(지성)’이며 또 ‘舊世代(구세대)’라고 우리가 규탄하던 者(자)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民族社會(민족사회)의 現實(현실)은 절박하다. 우리는 할 일이 너무나 많다.

따라서 우리는 이 時期(시기)를 하루라도 앞당기기 위하여 社會(사회)에서 退場宣告(퇴장선고)를 받은 ‘녹쓸은 知性(지성)’과 妥協(타협)하지 말며 年齡(연령)에 구애받지 말고 서로가 참되고 새로운 知性(지성)을 모색하는 共同(공동)의 廣場(광장)에서 한사람같이 손을 마주잡고 硏究(연구)하고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民族(민족)의 解放(해방)과 獨立(독립)을 위하여 피흘린 先輩(선배), 眞理(진리)의 守護者(수호자)로서 不屈(불굴)의 道德的勇氣(도덕적용기)를 발휘한 學者(학자) 또 社會奉仕(사회봉사)에 숨은 熱誠(열성)과 犧牲(희생)을 무릅쓴 분들의 자랑스러운 傳統(전통)을 繼承(계승)하고 그들을 尊敬(존경)할 줄 아는 後進(후진)으로서 몸과 마음가짐을 바로하여 目前(목전)에 直面(직면)한 難題(난제)에 뛰어들어야 할 때이다.

‘녹쓸은 知性(지성)’이 물러가는 社會(사회)의 氣風(기풍)이 조성되는 與件(여건)이 마련되도록 하는 것은 스스로의 責務(책무)이며 그것은 스스로 ‘녹쓸은 知性(지성)’이 되지 아니하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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