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선)은 成佛(성불)에의 大道(대도)

‘不立文字(불립문자), 直指人心(직지인심), 見性成佛(견성성불)’을 指向(지향)

理想的(이상적) 禪院(선원)의 建設(건설)을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法(법)이다. 마음을 찾으려고 三千六千世界(삼천육천세계)를 두루 찾아다닌들 없는 마음이 있을리 없다. 나(我(아))밖에서 마음을 찾으려 말고 조용히 안(內(내)을 들여다보자.

지금 여기서, 當場(당장) 내 마음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永遠(영원)히 마음을 보지 못할 것이며 제 마음을 보지 못할 것이며 제 마음자리도 바로 보지 못한 사람은 이 世上(세상) 온갖 것을 다지녀도 아무 所用(소용)이 없을 것이다. 보이는 것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들리는 것도 제대로 듣지 못하는데 어찌 사람이라고나 할 수 있으랴! 禪院(선원)은 조용히 제 마음을 內照(내조)하는 곳이다.

大學(대학)에 禪院(선원)을 創設(창설)하는 것은 寺刹(사찰)에 禪房(선방)이 없어서가 아니다. 禪(선)의 歷史(역사)는 千年(천년)을 넘고, 全國(전국)에 禪院(선원)은 無數(무수)히 많으나 우리 젊은 知性(지성)을 받아 드릴 수 있는 理想的(이상적)인 곳은 없었다. 우리는 우리 自身(자신)과 未來(미래)의 後進(후진)을 爲(위)해서, 그리고 잘못된 旣存(기존)의 모든 것을 바로잡기 爲(위)해서 率先(솔선)하여 새 時代(시대)에 맞는 새로운 禪院(선원)의 創造(창조)에 着手(착수)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입으로만 大乘(대승)을 외치지 말고 大乘(대승)의 實踐者(실천자)가 되어야겠다.

우리는 不立文字(불립문자)를 曲解(곡해)하여 文字(문자)의 捨却(사각)에 執(집)하기 보다는 文字(문자)마저도 버리지 않는 健實(건실)한 禪本然(선본연)의 姿勢(자세)로 돌아가야겠다. 禪本然(선본연)의 姿勢(자세)라 함은 一切(일체)를 不斷(부단)히 否定(부정)하는 것이요, 特定(특정)한 어느 하나를 否定(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一切(일체)를 否定(부정)하면서도 一切(일절)을 否定(부정)하지 않는다“는 禪(선)의 論理(논리)가 나온다. 特定(특정)한 어느 하나만을 否定(부정)한다면 거기에는 잘못도니 肯定(긍정)이 따르게 마련이며 絶對肯定(절대긍정)의 禪世界(선세계)는 열리지 않는다. 龍樹(용수)의 破邪(파사)는 그대로 顯正(현정)이었다.

우리가 이제까지 佛敎(불교)의 가르침을 그대로 實踐(실천)에 옮기지 못한 것은 아는 것이 不足(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아는 것을 實行(실행)할 힘이 없었다. 行(행)이 없는 앎은 眞正(진정)한 앎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文字(문자)를 通(통)하여 얻어들은 對象化(대상화)된 知識(지식)은 境遇(경우)에 따라서는 忘却(망각)도리 수도 있는 不完全(불완전)한 앎이다. 禪(선)에서 말하는 앎은 말로서 보다는 行(행)으로 나타나는 永遠(영원)한 智慧(지혜)이다. 行(행)이 그대로 知(지)인 앎, 이것이 바로 禪的(선적)인 앎이다.

外部(외부)로부터 耳目(이목)을 通(통)하여 들어오는 知識(지식)은 內心(내심)의 智慧(지혜)를 觸發(촉발)하는 媒介物(매개물)에 不過(불과)하며 內心(내심)에 般若(반야)의 慧光(혜광)이 밝혀지지 않는 限(한) 外部(외부)로부터 오는 知識(지식)은 불質的(물질적) 蓄積(축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번 내 마음이 뚜렷이 밝아질 때 마음은 內外(내외)의 別(별)이 없어지고 一切(일체)가 된다. 그때에는 行(행)이 그대로 知(지)이며 知(지)가 곧 行(행)이 된다.

이러한 境地(경지)에 이르기 爲(위)하여 우리는 먼저 我執(아집)을 버리고 마음밖에 따로 부처가 없음“ (卽心是佛(즉심시불))을 疑心(의심)없이 믿고 스스로 그 뜻을 淸淨(청정)하게 하여 (自淨其意(자정기의)저 푸른 하늘처럼 트이게 하여야 한다(當淨其意如虛空(당정기의여허공)). 이에 이르면 維摩經(유마경)에 있는 ”心淨則國土淨(심정즉국토정)“의 理想(이상)도 現實(현실)될 수 있을 것이다.

大學禪院(대학선원)에서는 定期的(정기적)인 精進法會(정진법회)를 마련할 것이다. 우리는 禪的精進(선적정진)을 通(통)하여 우리의 本來(본래)모습을 깨닫고 말만을 앞세우며 이를 實行(실행)할 힘이 없는 脆弱(취약)한 舊穀(구곡)에서 脫皮(탈피)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서로의 有機的(유기적)인 琢磨(탁마)아 健全(건전)한 成長(성장)을 爲(위)하여 禪學講座(선학강좌) 禪問題(선문제) ‘심포지움’을 開催(개최)할 것이다. “不立文字直指人心(불립문자직지인심), 見性成佛(견성성불)”을 標榜(표방)하는 우리가 다시 이러한 모임을 갖는 것은 첫째 禪(선)이 直觀(직관)을 通(통)한 自己(자기)만의 世界(세계)라하여 各其(각기) 道人然(도인연)하는 廢風(폐풍)을 없애고 그 眞僞(진위)를 가려내어 斬新(참신)하고 紀網(기망)있는 禪風(선풍)으로 佛敎界(불교계)의 維新(유신)에 寄與(기여)코져 하기 爲(위)함이며, 둘째 不立文字(불립문자)를 曲解(곡해)하여 是非(시비)를 일삼는 似而非(사이비) 禪客(선객)이나 또는 昏沈(혼심)에 잠긴 闇證禪師(암증선사)가 되지 않돍 스스로를 警策(경책)하기 爲(위)하이다.

實(실)로 우리는 大學禪院(대학선원)이라는 選佛場(선불장)을 通(통)하여 不動(부동)의 定力(정력)을 길러 죽는 순간에까지 흔들리지 않고 文殊(문수)의 智慧(지혜)와 觀音(관음)의 慈悲(자비)와 普賢(보현)의 願行(원행)을 한몸에 지녀 佛陀(불타)와 龍樹(용수), 元曉(원효) 等(등) 諸先輩(제선배)의 崇高(숭고)한 精神(정신)을 繼續發展(계속발전)시킬 것을 다짐하는 바이다.

大學禪院(대학선원)은 職業(직업) 性別(성별) 人種(인종) 等(등) 一切(일체)를 넘어서서 僧俗(승속), 信徒(신도), 非信徒(비신도)를 莫論(막론)하고 萬人(만인)에 公開(공개)된다. 禪(선)은 모든 形式(형식)과 法則(법칙)을 超越(초월)한 가장 自由(자유)로운 成佛(성불)에의 大道(대도)이기 때문이다.

물의 차고 더운 것은 스스로 마셔보아야 하는 法(법)이니 모두 와서 몸소 禪味(선미)를 體驗(체험)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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