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도 강했었다. ‘칸트’의 선험적 비판론에서 우리의 참모습을 찾기에는 그 物自體(물자체)의 세계는 너무나도 떨어져있다. ‘쇼펜하우어’의 맹목적 생의 의지가 우리의 참모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義人(의인)과 學者(학자)들이 義理(의리)와 진리를 위하여 生(생)을 버렸다. ‘스펜서’의 不可知的(불가지적) 세계에 우리의 참모습이 잠겨있다고 하기에는 우리의 自我意識(자아의식)은 너무나도 明證的(명증적)이다. ‘니체’의 超人(초인)이 우리의 참된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우리는 너무도 동물적 요소를 많이 갖고 있는 미약한 자연물이다. ‘베르그존’의 약동하는 生(생)의 衝擊(충격)이 우리의 참모습이라고 하기에는 우리는 너무나도 異質的(이질적) 죽은 물질의 지배를 받고 있다. 지식과 친절에 용기를 더하여 神(신) 앞에서도 감히 두려워하지 않는 공명정대한 ‘럿셀’경의 자유인의 창조적 知性(지성)이 우리의 참모습이라고 하기에는 우리는 역사상에서 너무나 많은 서로 반대되는 공면정대의 기준들을 경험했다. 럿셀경의 모국인 영국의 속담말에 One man’s meat is another man’s poison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이해타산이 빠른 영국사람들의 오랜 경험에서 생겨난 말이다.

理念(이념)보다 앞서는 實存(실존)이 우리의 참모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현대인들이 이념투쟁을 하고 있다. 實利(실리) 實用(실용)의 추구가 우리의 참모습이라고 하기에는 동양인은 예부터 너무나도 仁(인)과 義(의)에 살아왔다. 우리가 앞으로 “위하여 일할 우리의 참모습”은 과연 어떤 것일까? 우리를 아들처럼 사랑하여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은 너무나도 모순과 不義(불의)에 가득찼고 죄지은 아들을 위하여 마련된 아버지의 지옥불은 너무나도 참혹하다. 당신도 나도 다같이 동일한 ‘브라흐만’에 근거하고 있는 同質的(동질적)인 小我(소아)라고 하기에는 당신과 나는 너무나도 서로 통하지 않는 점이 많다. 因果應報(인과응보)의 思想(사상)대로 내가 지는 業(업)의 결과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이다. 우리의 참모습이 三綱五倫(삼강오륜)에 있다고 하기에는 恒産(항산)없이도 恒心(항심)을 유지하기에는 너무나도 경제적 조직이 강한 현대사회이다. 우리인간의 참모습은 經濟的機構(경제적기구)의 한 모멘트에 불과하다고 보는 공산주의자들은 사실상 너무나도 관념적 이론을 믿고 있고 우리의 참모습을 自由(자유)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는 자유민주주의자들은 너무나도 資本(자본)에 매달려 행동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는 빵을 먹지 않고 믿고 살며 민주주의자들은 자유를 누리지 않고 먹고 살고 있다. 左(좌)에서 떠난 자는 右(우)로 몰려가고 있고 右(우)에서 떠난 자는 左(좌)로 몰려가고 있다. 과연 변증법은 진리인가보다. 시계의 펜듀람처럼 우왕좌왕하면서 살아오는 것이 우리인간의 참모습인가보다. 그러나 左(좌)로 갈거냐 右(우)로 갈거냐 우리가 설탕을 우리 스스로가 선택하기 전에 이미 마치 드라이바에게 몰린 나사못처럼 필연적 趨勢(추세)로 우리를 몰아세우고 있는 듯한 숙명적 느낌에 순간마다 부닥치기도 한다. 우리인간의 참모습은 과연 어느 것일까?

이 모든 것들 가운데서 어느 것을 우리들의 새 文化(문화)건설의 최고이념적 목표로 내 세울까? 이 모든 것들을 다 부정하여 버릴까? 그러면 우리들의 앞날에는 기성문화의 전적인 파괴가 있을 뿐이다. 다 긍정하여볼까? 그러면 지금 이 사회의 모순과 갈등도 그냥 그대로 조장될 것이다. 모두 합쳐서 종합절충하여 볼까? 그러면 現存(현존)하는 惡(악)과 不義(불의)에 대한 타협과 굴복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인간은 이미 주어진 이 현실에 대하여 긍정, 부정, 종합절충 이외의 어떤 다른 길을 취할 수는 없다. 이래서 인생은 시비곡절과 모순 갈등과 선악대립이 뒤섞인 苦海(고해)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간이 지금까지 영위한 모든 일과 그 결과는 엄밀히 따지고 보면 다만 단편적인 트리크에 불과할 뿐, 문명, 문화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통일성을 결하고 있다.

그러면 인간이면서도 누구보다도 더 높이 인간을 평하가였기 때문에 도리어 인간을 일단 부정한 佛陀(불타)의 입장에서는 우리 인간의 참모습이 어떻게 파악되었을가?

불타의 입장에 설때에는 이 모든 과학, 도덕, 철학, 정치사상, 종교들의 그 내용적 시비장단이 가려지기 전에 즉 주어진 현실에 대하여 긍정, 부정, 종합이 있기 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은 무슨 주장이든 자기주장을 하지 않고는 못견디는 그런 “自己主張性(자기주장성)”을 가지고 있음이 인정된다. 그리고 이 자기주장성이야 말로 인간의 가장 기본성격이며 인간사회의 모든 모순, 갈등, 시비곡절, 선악대립이 모두 이것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며 이것을 “執着性(집착성)”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주장성이 있다. 자기주장성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各自(각자)는 남 아닌 자기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자기주장성으로 인해서 각자는 자기이상도 자기이하도 아닌 바로 자기자신으로 제한 당하고만다. 이 자기주장성에 의하여 주장된 제한된 자기들의 모습이 바로 역사상에 나타난 모든 主義(주의)와 宗敎(종교)들이고 또 거기에 부수된 여러 가지 文化形態(문화형태)들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불교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주장된 자기”와 “주장하고 있는 자기”를 구별하고 그 “주장된 자기”의 根底(근저)에서 “주장하고 있는 자기”야말로 참된 자기라고 보고 이 참된 자기는 주장된 假裝(가장)된 자기를 버림으로써 비로소 如實(여실)히 드러나게 된다고 본다. 그 주장된 자기의 일체 주장을 버리고 주장하는 참 자기애로 돌아간 그 자리가 곧 불교의 空(공)의 입장이다. 참 주체적 자각은 “주장된 자기”에 있는게 아니라 도리어 그 주장된 가짜 자기 즉 假我(가아)를 벗어난 곳에서 이루어진다고 보는데에 空思想(공사상)이 언제 어디에서나 모든 다른 학설과는 전혀 방법론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자기주장을 하는 것이 執着(집착)이고 주장된 자기를 벗어나는 것이 解脫(해탈)이고 해탈된 自己(자기)가 곧 佛陀(불타) 즉 覺者(각자)이다. 제각기 다른 주장을 하는 우리들은 자기 주장이 벗어진 자리에서야 비로소 “주장된 자기주장”들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주장된 자기주장”을 벗어 난다고 함이 자기주장마저 포기한 무관심의 상태를 의미함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주장과 남의 주장을 아울러 가질 수 있는 좀 더 고차적인 입장에 서기 위하여서는 보다 낮은 입장을 버려야 된다는 말일 뿐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런 고차적인 입장은 일체 자기주장이 없어질 때 비로소 알 수 있게 된다는 말이지 그 자리에서는 일체주장이 없어진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런 자리에서 행하여지는 자기주장은 그 전 것들보다 더 고차적이란 말일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얻어진 空(공)의 자리에서 재평가된 자기주장이 곧 佛菩薩(불보살)의 妙有的誓願(묘유적서원)이다. 佛菩薩(불보살)의 誓願(서원)으로 이루어지는 세계가 곧 佛國土(불국토)이다. 불국토의 가치체계를 구성하는 불보살들의 서원들은 空(공)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기 때문에 一連(일련)의 統一(통일)된 가치체계를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자기주장을 벗어남으로서 얻어진 空(공)의 입장에서 재평가 받지않은 자기주장들은 共通分母(공통분모)를 잃어버린 分子(분자)들과 같아서 일련의 통일된 가치체계를 이룰 수는 없다. 일련의 통일된 가치체계가 성립되지 않는 곳에 진정한 역사와 문화가 있을 수 없다 거기서는 다만 단편적인 사이비 文化(문화)가 흥망성쇠할 뿐이다. 각자의 주장이 공통된 기준에서 재평가 받음으로서 비로소 모든 자기주장들은 그 眞價(진가)를 드러내게 되고 그런 진가가 드러난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 모든 주어진 뒤섞인 주장들을 일련의 통일된 가치계열로 엮을 수 있고 이렇게 일련의 가치계열이 성립된 뒤에야 비로소 진정한 역사의 발전과 文化(문화)의 건설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일련의 통일된 가치계열의 성립을 가능하게하고 모든 개개의 주장들의 공통분모가 될 수 있는 그런 원리적 성격을 갖춘 진리가 곧 불교의 空思想(공사상)이다.

(글쓴이‧佛大講師(불대강사)) 元義範(원의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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