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間觀念(시간관념)’이 박약하다고 해봤다. 時計(시계)를 의젓이 차고 있으면서도 時間(시간)을 안 지키는 물론 時計(시계)마다의 時差(시차)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침저녁에 지나치는 거리의 時計鋪(시계포)나 商店(상점)에 걸린 時計(시계)들. 그것들은 저마다의 文字版(문자판)을 가르키고 있다. 그 時差(시차)를 보면 적어도 몇 분에서 몇 十分(십분)에 이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都市(도시)의 時間觀念(시간관념)에 대한 差異(차이)는 고작해야 二(이), 三十分(삼십분)에 지나지 않는다.

▲ 이번 地方寺刹踏査(지방사찰답사)를 마치고 온 某(모) 敎授(교수)는 시골 사람들의 박약한 時間(시간)과 距離觀念(거리관념)의 화를 톡톡히 봤다고 한다. ‘담배 한 대 피울 동안’이면 넉넉히 到着(도착)하리라던 目的地(목적지)가 二(이), 三十分(삼십분)이나 걸려, 결국 自動車(자동차)를 놓쳤다는 것. 이러고 보면 都市(도시)와 地方(지방)과의 實質的(실질적)인 時間觀念(시간관념) 上(상)의 差異(차이)는 一(일), 二時間(이시간)이나 된다.

▲ 農村(농촌)이란 農繁期(농번기)가지나면 悠悠自適(유유자적), 한가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그 까짓 時差(시차)에 구애될 바가 아니다. ‘老兄(노형) 年歲(연세)가 몇이시오?’ 하고 물으면 ‘스물너덧대 됐읍니다!’고 年令計算(연령계산)부터 一(일), 二年(이년)쯤 얼버무려도 問題(문제)가 안되어 온 그들이다. 그러나 씨뿌릴 때와 걷우어 드리는 時期(시기)만은 누구보다도 잘 지키려한다.

▲ 學期末試驗(학기말시험)을 며칠 앞두고 受講(수강) 申請(신청)을 하는 사람이 있다. 學期(학기)가 始作(시작)되기 六(육) 個月(개월)만 인대 이럴 수가 있을까 하고 啞然(아연)해진다.

無事泰平(무사태평)에도 분수가 있다. 講義(강의)를 듣자면 受講申請(수강신청)이 앞섰어야 할 일이다. 그러고 보면 講義(강의)는 전혀 듣지 않았다는 속단을 免(면)할 길이 없다.

▲ ‘本來(본래) 할 일 없는 사람들은 時間(시간)을 지키지 않는다. 보기엔 바쁜 듯 하지만 한 閑暇(한가)한 時間(시간)이 너무 많아 그 時間(시간)의 浪費欲(낭비욕)에 빠지는 까닭’이라고 中國人(중국인)의 時間理念(시간이념)을 말한 評論家(평론가)가 있었다. 이와 反對(반대)로 바쁜 일에 從事(종사)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時間觀念(시간관념)이 强(강)하다는 結論(결론)이다.

▲ 悠長(유장)을 美德(미덕)으로 아는 農夫(농부)도 씨뿌릴 때와 거두어 드릴 때는 지킨다. 學究(학구)에 餘念(여념)이 없다면 이따위 게으름은 想像(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大學(대학)으로부터 ‘게으름’을 몰아내야겠다는 생각을 强調(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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