落書(낙서)에 對(대)한 公開書翰(공개서한)

‘어떤 廣場(광장)의 파노라마’에 對(대)한 反論(반론)

丁海文(정해문)

新羅精神(신라정신)은 歷史(역사)속에

底流(저류)하는 永遠(영원)에의 길

遺産(유산)은 傳統(전통)과 關係(관계)깊어

 

○…沈滯(침체)와 踏步(답보) 속의 우리 文壇(문단)에 최근 ‘文學論爭(문학논쟁)’이 커다랗게 ‘크로즈·엎’되어 활기를 띄우고 있다. 특히 ‘文學春秋(문학춘추)’誌上(지상)을 통한 本校(본교) 徐廷柱(서정주) 교수와 評論家(평론가) 金宗吉(김종길)씨 간의 격렬한 論爭(논쟁)은 徐(서)교수의 新羅精神(신라정신)(永遠主義(영원주의))를 위요한 詩精神(시정신)의 論爭(논쟁)으로 關心(관심)을 자아내고 있다. 우리 詩壇(시단)의 代表的詩人(대표적시인)인 徐(서)교수의 詩精神(시정신)에 對(대)한 意見(의견)은 本報(본보) 第262號(제262호)에 게재된 小論(소론) “어떤 廣場(광장)의 파노라마” (朴鎭煥(박진환))에서도 言及(언급)되었다. 이 小論(소론)을 둘러싸고 本校文學(본교문학)도들의 反論(반론)이 殺到(쇄도)하고 있는데 그 중 丁海文(정해문)君(군)의 것을 소개한다. (編輯者(편집자))

 

일찌기 저는 아주 건실한 미장이를 보았습니다. 그 분은 참 훌륭하게 일을 잘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처음부터 그 분에게 토역일을 시켰습니다. 그러면 그 분은 솜씨 곱게 우리들의 집을 아름답게 단장시켜 주곤 합니다. ‘花蛇集(화사집)’, ‘歸족途(귀족도)’, ‘新羅抄(신라초)’ 모두 아름다울 뿐입니다.

다시 어느 누구가 그분만큼 勞動(노동)할 수 있을가,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사이 그분이 공드려 만든 塔(탑)을 시기하는 四寸(사촌)들이 생겨 못 먹는 감 터뜨려나 본다는 式(식)으로 잡소리를 해대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그 분은 그렇게 말씀하신 대로 ‘千年江(천년강)을 건너 移住(이주)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도 내일도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목청을 가다듬어 廣場(광장)을 향해 노래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 분은 드디어 커다란 수확으로 新羅(신라)의 世界(세계)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개방하셨습니다. 잘 눈독드려 읽어 보십시오. 그리고 제발 깨끗하게 단장해 논 벽에다 洛書(낙서)들일랑은 그만 두십시오. 만약 그러면 그 분은 또 그 지저분하게 된 곳을 고쳐야 할게고 닦아 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인정한다면 洛書(낙서)들일랑은 말을 것이지 괜히 필요 없이 努力(노력)을 낭비하게 만듭니까. 확실히 그것은 戰後(전후)의 젊은 評論家(평론가)들의 體質(체질)인지 모르겠습니다만은 다음에 인용된 詩人(시인) 文德守(문덕수) 氏(씨)가 쓴 ‘新羅精神(신라정신)에 있어서의 永遠性(영원성)과 現實性(현실성)’에 표頭(두)를 읽으십시오. “戰後(전후) 한국문학에 광신적 지배력을 휘두르고 있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現實(현실)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現實(현실)이니, 歷史的(역사적)현실이니 현실성이니 앙가쥬망이니 하면서, 이말을 문단의 화제를 거의 독점할 수 있는 유행어로서의 脚光(각광)을 받아, 일부 젊은 평론가들의 혈기를 돋구는데 충분한 자극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戰後(전후)의 文學思想(문학사상)을 지도하고 추진해 나가는 思想的(사상적) 據點(거점)을 대변하는 용어이기도 했다. 사실, 어떤 작가를 칠 때에는 이 말이 창劍(검)의 구실을, 어떤 작품을 분석할 때에는 현미경과 메스의 구실을, 茶房(차방)이나 酒席(주석)에서는 열띈 토론의 主題(주제)로 등장할 수도 있었다.”

확실히 ‘現實(현실)이니, 歷史的(역사적)현실이니 현실성이니 앙가쥬망이니’하는 것은 자극제가 되는가 합니다. 그래서 오새 일부 평론가드이 혈기차게 작가들이나 詩人(시인)들을 위와 같은 조건에 대입시켜 두드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新羅精神(신라정신)은 말씀대로 現實性(현실성)이 없는 精神(정신)은 아닙니다.

오로지 거기에는 現代(현대)의 廣場(광장)에서 볼 수 있는, 볼수 없는 각가지의 生活(생활)이 많은 共同(공동)의 廣場(광장)입니다. 어찌 이것을 現實性(현실성)이 없는 내일의 永遠(영원)의 美學(미학)이라고 이름지으십니까.

그러면 심지로 徐先生(서선생)님의 작품을 하나 擇(택)해서 읽기로 하겠습니다.

‘봅은 바윗가에 잡은 손의 암소 놓고 날 아니 부끄리시면 꽃을 꺾어 드리리다’

이것은 어떤 신라의 늙은이가 젊은 여인네하네 건네인 수작이다.

‘老人獻花歌(노인헌화가)에서’

‘꽃이 꽃을 보고 웃드시 하는’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척촉花(화)(자연)와 現實(현실)과의 조화로, 水路夫人(수로부인)과 純貞公(순정공), 水路夫人(수로부인)과 척촉花(화), 水路夫人(수로부인)과 無明老人(무명노인), 無明老人(무명노인)과 척촉花(화), 모두 現實的(현실적) 人間關係(인간관계)를 들어내고 있습니다. 특히 척촉花(화)와 無明老人(무명노인) 사이에는 超人的(초인적)인 神力(신력이 발휘되어 그것이 水路夫人(수로부인)에게는 生(생)의 근원적인 몸짓으로 교성되어 宗敎的(종교적)인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을 도표로 간단명료하게 그려보이면‥‥(紙面關係上省略(지면관계상생략))

‥‥이과 같은 데 徐先生(서선생)님은 이러한 精神(정신)의 계승을 1959년 2월 15일字(자) ‘한국일보’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新羅精神(신라정신)이 우리 것 보다 더 가지고 있었던 것은 뭐냐하면 그것은 알아 듣기 쉽게 요샛말로 하면 永遠主義(영원주의)입니다. 現生(현생)만을 重要視(중요시)하여 理致(이치)나 모랄이나, 志向(지향)이나, 感情(가멎ㅇ)을 가진 것이 아니라 永遠(영원)을 立場(입장)으로해서 가졌었단 말씀입니다. 허나 이말이 新羅(신라)시절에만 그랬다가 高麗(고려)의 儒學天下(유학천하) 以來(이래) 끊어져 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傳統(전통)이라는 것이 어디가 그런 것인가요. 儒學的(유학적) 現實主義(현실주의)만 가지고는 除外(제외)할 수 없던-이 精神(정신)의 또다른 힘은 高麗以來(고려이래) 모든 權威(권위)의 밑바닥에 숨은 한 개의 ㅇ勢力(ㅇ세력)이 되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傳承(전승)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新羅(신라)의 하늘은 自發的(자발적)인 것입니까. 新羅(신라)의 하늘을 제가 보기에는 永遠(영원)에의 길로 吉(길)히 사는 길이라 하겠습니다. 어디에도 自殺的(자살적) 요소라는 것은 없습니다. 마냥 키우기만 하면 많이 잘 커갈 요건 뿐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한가지 點檢(점검) 하건대 先輩(선배)님 우리는 ‘遺産(유산)을 버려야 할 때’입니까. 물론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코 우리는 遺産(유산)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눈에 보이든 눈에 안보이든 傳統(전통)과 관계가 깊기 때문에 석수쟁이가 돌을 쪼아내듯 떼어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T·S엘리올도 이것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傳統(전통)과 個人的(개인적) 才能(재능)’에서 말했습니다.

‘전통은 훨씬 더 넓은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계승될 수 없는 것이요, 다만 우리가 그것을 획득하려면 우리는 큰 勞役(노역)으로써 그것을 획득해야한다.’ 그리고 또 ‘歷史的(역사적) 感覺(감각)이란 과거의 과거성 뿐만 아니라 그 현재성에 대한 知覺(지각)을 내포한다.‥ 역사적 감각-그것은 일시적인 동시에 無時間的(무시간적)인 것의 감각이요, 또한 무시간적인 것과 일시적인 것을 합친 것의 감각이다.’

이와 같은 서구적 理論(이론) 위에서도 新羅精神(신라정신)은 펄펄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른바 이것이 역사적 參與(참여)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新羅(신라)의 精神狀態(정신상태)입니다. 또한 과거, 현재, 미래의 三世(삼세)를 두루 통하는 역사적 정신상황인 것입니다.

이제 反論(반론)은 끝났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또 말해 드릴 것은 그것의 뜨뜨미지근한 ‘結景(결경)’입니다. 주장하시는 바와 같이 모호합니다. 한편의 評論(평론)이면 그것이 짧던, 길던 비방하는 일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제시하는 바의 주장하는 것이 명확히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國文科(국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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