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主政治(민주정치)가 人民(인민)에 의한 政治(정치)라지만 그것은 다시 말해서 自治活動(자치활동)을 하는 政治(정치)라는 말일께다. 그러기에 自治能力(자치능력)이 없는 國民(국민)은 民主政治(민주정치)를 營爲(영위)할 資格(자격)이 없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終戰以後(종전이후) 後進國(후진국)에서 많이 論議(논의)되고 있는 소위 善意(선의)의 獨裁(독재)라는 말은 結局(결국) 自治能力(자치능력)이 없다는 悲嘆(비탄)이며 民主政治(민주정치)를 이룩할 수 있는 바탕이 안되어있다는 率直(솔직)한 告白(고백)일 수밖에 없다. 獨裁(독재)면 그것이 어떻게 분장되었던지간에 獨裁(독재)일 뿐이지 거기에 무슨 얼토당토않게 善意(선의)의 獨裁(독재)란 怪變(괴변)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 世上(세상)의 어느 누가 惡意(악의)의 獨裁(독재)를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 獨裁者(독재자)는 그 누구를 莫論(막론)하고 허울좋은 口實(구실)을 붙여서 民衆(민중)을 愚弄(우롱)하고 欺瞞(기만)하는 것이 常習(상습)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愚弄(우롱)과 欺瞞(기만)에 빠져 넘어가는 民衆(민중)이야말로 民主政治(민주정치)를 맛볼 資格(자격)이 없는 者(자)들이며 獨裁政治(독재정치)를 甘受(감수)할 수밖에 없는 存在(존재)인 것이니 好不好(호불호)의 選擇(선택)은 結局(결국) 스스로가 自取(자취)하는 것이다.

눈을 멀리 外國(외국)에 돌릴 것도 없이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뼈아프고 貴重(귀중)한 쓰라린 經驗(경험)을 많이 해왔다. 허울 좋은 民主主義(민주주의)의 걷겁데기를 멋도 모르고 많이 핥아 왔다.

되풀이 되풀이 끈덕지게 고개를 드는 獨裁(독재)의 모습을 目擊(목격)해왔다. 民主政治(민주정치)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自治活動(자치활동)의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體驗(체험)해왔다. 그러나 아직 이땅의 健全(건전)한 民主政治(민주정치)의 實現(실현)이란 遼遠(요원)한 것만 같다.

民主政治(민주정치)를 實現(실현)할 수 있는 참다운 바탕이 아직도 덜 마련된 것 같다. 우리들은 정말 언제까지나 이 政治以前(정치이전)의 政治狀態(정치상태)를 甘受(감수)해야만 할 것인가.

太山(태산)이 아무리 높아도 오를 날이 있다는데 民主政治(민주정치)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이땅에 實現(실현)될 날이 있을 것은 틀림없는 事實(사실)이다. 그런데 그 希望(희망)은 來日(내일)의 主人公(주인공) 學生(학생)들에게 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이 아무리 괴로워도 내일이 즐거울 것을 바라고 참는 것은, 오늘이 아무리 캄캄하여도 내일이 밝고 빛날 것을 바라는 것은 오로지 자라나는 世代(세대) 늠름한 내일의 主人公(주인공)들이 있기 때문이다. 學生(학생)들 마져도 정말 學生(학생)들 마져도 참다운 自治能力(자치능력)을 發揮(발휘)못한다면 어떻게 무엇을 바라고 우리는 살라는 말이냐 그것은 차라리 주엄을 意味(의미)하는 것일 뿐 아무런 脫出口(탈출구)도 없는 것이다.

社會(사회)가 아무리 腐敗(부패)하여도 學生(학생)들은 썩지 말아야 할 것이다. 社會(사회)가 아무리 不正(부정)하여도 學生(학생)들은 公正(공정)하여야 할 것이다. 社會(사회)에 아무리 暴力(폭력)이 亂舞(난무)하여도 學校(학교)는 明朗(명랑)이 支配(지배)하여야 할 것이다.

萬一(만일) 정말 萬(만)의 一(일)이라도 學校(학교)의 自治活動(자치활동)이 健全(건전)과 公正(공정)과 그리고 明朗(명랑)을 逸失(일실)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땅에 民主主義(민주주의)의 吊鍾(적종)을 울려주는 것이요, 獨裁政治(독재정치)에로의 줄다름을 豫告(예고)해주는 것이다.

우리 東國大學校(동국대학교)의 總學生會(총학생회) 任員選擧(임원선거)가 이날 18日(일)로 迫頭(박두)하였다. 다시 말하면 우리 東大生(동대생)의 自治能力(자치능력)에 有無(유무)를 저울질할 좋은 機會(기회)는 왔다.

모쪼록이면 健全(건전)하고 明朗(명랑)한 選擧雰圍氣(선거분위기)를 이룩하여 民主力量(민주역량)을 誇示(고시)하는 同時(동시)에 혼탁한 이 社會(사회)에 맑은 空氣(공기)를 불어 넣고 他(타)의 龜鑑(귀감)이 되는 模範的(모범적)인 選擧(선거)를 이룩해 주기 바라는 것이다.

特(특)히 各級(각급) 幹部陣(간부진)의 立候補者(입후보자)들은 正當明快(정당명쾌)한 ‘훼어·푸레이’로서 選擧(선거)에 臨(임)하여 來日(내일)의 이 社會(사회)에 期待(기대)를 걸 수 있도록 하여주기 바라는 바이다. 修身齊家(수신제가) 治國平天下(치국평천하)라는 平凡(평범)한 말을 다시 되씹어 주기 바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밟아온 오辱(욕)의 歷史(역사)는 結局(결국) 따지고보면 自業自得(자업자득)이다. 앞으로 展開(전개)될 우리의 歷史(역사)도 終當(종당) 우리 自身(자신)이 選擇(선택)하는 것이다. 우리는 過去史 (과거사)를 恨嘆(한탄)하기 前(전)에 맥없이 부픈 未來(미래)만을 苦待(고대하기 前(전)에 오늘에 닥친 우리들의 課業(과업)을 最善(최선)을 다하여 完遂(완수)하는 것이 보람있는 過去(과거)를 만드는 길이요 빛나는 내일을 造成(조성)하는 捷徑(첩경)이다.

學生(학생)들의 뛰어난 自治活動(자치활동)을 두손모아 간절히 미는 마음 그지없다.

 

 

慶州南山(경주남산) 三陵溪石佛(삼릉계석불)의 發見(발견)

朴日薰(박일훈)

東大(동대) 李長洙(이장수)·李源明(이원명) 兩君(양군)이 發見(발견)

佛敎美術硏究(불교미술연구)의 貴重資料(귀중자료)

53日間(일간)의 露宿(노숙) 끝에 얻어

 

新羅古都(신라고도)인 慶州(경주)분地(지)의 南方(남방)에 위치한 南山(남산) 또는 金오山(금오산)은 長(장)수圓形(원형)으로 延延(연연)히 起伏(기복)되고 南(남)으로 해目嶺北(목령북)으로 冷谷岩峰(냉곡암봉)이 隆起(융기)되어 山谷(산곡)은 주름이 깊고 屈折(굴절)이 많은데 中腹以上(중복이상)은 仙巖(선암)이 叢立(총립)되고 山骨(산골)이 드러나서 怪岩奇石(괴암기석)이 亂立(난립)하였다.일찌기 新羅(신라)에 佛敎(불교)가 傳來(전래)된 以後(이후) 山(산)록周圍(주위)에는 數(수)많은 巨刹大寺(거찰대사)가 連(연)하였고 全山溪谷(전산계곡)마다 堂塔(당탑)이 建立(건립)되고 山巖(산암)마다 磨애佛像(마애불상)을 새겨 佛敎道場(불교도장)으로 아침햇빛에 자煙(연)은 香氣(향기)가 드높고 斜陽(사양)에 범패와 경고는 溪谷(계곡)을 흔들었다. 이렇듯 新羅人(신라인)의 心田(심전)을 啓發(계발)하는 聖地(성지)는 千載(천재)의 悠久(유구)한 星霜(성상)이 흐른 오늘날은 往時(왕시)에 盛旺(성왕)하였던 靈域(영역)은 너무나 허무한 자취를 남기고 말았다. 信仰(신앙)의 唯一(유일)한 대상이었던 金堂(금당)에 安置(안치)된 尊佛(존불), 舍利(사리)를 奉安(봉안)하였던 玉塔(옥탑)들은 散散(산산)히 轉倒(전도)되어 草露(초로)에 묻히고 형극에 얼키어 혹은 流沙(유사)로 매몰되는 비참한 운명에 이르렀다. 다만 仙岩絶壁(선암절벽)에 조각된 磨애佛塔(마애불탑)은 선태를 쓰고 四時寒露霜雪(사시한로상설)에 시달리고 風磨雨洗(풍마우세)로 磨滅(마멸)되어가고 있다. 그 당시의 聖地(성지)로서 신앙의 靈場(영장)으로서 新羅人(신라인)의 讚仰(찬앙)의 중심이었던 그 위대한 佛敎遺蹟(불교유적)은 아직도 그 명맥이 남아 해마다 山谷(산곡)을 찾아 遍踏(편답)하는 學徒(학도)들의 수가 증가되고 있다. 그중 冷谷岩(냉곡암)봉의 西南(서남)쪽은 三陵溪(삼릉계)로 알려져있고 南山(남산)의 溪谷中(계곡중)에도 佛蹟(불적)이 第一(제일)많은 이계곡에 또하나의 石佛(석불)이 발견되어 學界(학계)는 물론 세상의 이목을 놀라게 하였다.

발견된 동기는 지난 七(칠)월 三十一(삼십일)일 八(팔)월一(일)일 兩日(양일)에 걸쳐 東大佛敎科(동대불교과) 四學年(사학년) 李長洙(이장수), 李源明(이원명) 兩君(양군)이 南山(남산)을 踏査(답사)하고 마지막 이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도중 路傍(노방)에 埋沒(매몰)되어 있는 石佛(석불)의 衣紋一部(의문일부)가 이들의 精銳(정예)한 視野(시야)에 비치자 佛體(불체)의 一部分(일부분)임을 짐작하고 피로에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熱心(열심)히 흙을 파헤쳤다.

차츰 들어 나는 佛體(불체) 衣紋(의문)은 確實(확실)하였고 한사람은 곧 洞里(동리)를 찾아가서 삽을 발려와서 두 사람은 열심히 흙을 파헤쳐 左肩(좌견)까지 露出(노출)시켰으나 周圍(주위)에 큰 岩石(암석)이 박혀 以上(이상) 더 發掘(발굴)은 중지하고 그 다음날인 8월 2일 慶州博物館(경주박물관)에 신고하게 되었다. 筆者(필자)는 곧 地圖(지도)를 펴고 발견된 위치를 銘念(명념)하였다. 처음 이 두 학생들을 대할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매년 여름 放學(방학)을 이용하여 露宿準備(노숙준비)를 하여 무거운 짐을 한짐씩 짊어지고 두사람 혹은 세사람씩 떼를 지어 江山(강산)을 편답함을 가끔 보고 있지만 이 학생들은 唯獨(유독) 옷차림이 ᄄᆞᆷ이 베여 소금에 저은 것 같고 샤쓰는 남고 헤어져 봉창이 나서 움직이면 입을 벌여 무릎이 그대로 드러나고 새까맣게 탄 얼굴에 건강의 모습이 깃들었다. 오늘이 집을 떠난지 五十三(오십삼)일. 그동안 西部地方(서부지방) 濟州道(제주도) 慶南一帶(경남일대)를 거쳐 慶州(경주)에 와서 南山(남산)의 峻險(준험)한 溪谷(계곡)을 二(이)일간으로 전부 踏査(답사)하였다고 자신만만한 자랑을 하였다. 이번에 石佛發見(석불발견)의 소감을 물었더니 ‘石佛(석불)이 光明(광명)을 받게됨이 기쁜 일’이라 하였다. 나는 이 두 학생들이 발견한 노고를 위하고 좋은 資料(자료)를 얻기 위하여 그날 남은 時間(시간)에 우선 位置(위치)라도 確認(확인)할 예정을 하였으나 當日(당일)로 往復(왕복)이 어려워 약간의 發掘準備(발굴준비)를 하여 八月三(팔월삼)일 館員(관원)을 동원하여 現場(현장)을 찾아갔다.

石佛(석불)의 位置(위치)는 三陵(삼릉)에서 約四○○(약사공공)M 계곡의 어구에서 左側(좌측) 山中腹(산중복)에 있는 磨애觀音(마애관음)보살立像(입상)의 南(남)쪽下方(하방) 溪川(계천)과 並行(병행)된 路傍(노방) 數珠(수주)의 松木(송목)이선 사이였다.

上(상)을 束(속)으로 두고 옆으로 누은 左側肩部(좌측견부)가 露出(노출)되어 있었다. 곧 坐佛(좌불)임을 確認(확인)하였으나 頭部(두부)가 아깝게도 缺損(결손)되었음을 알게되자 섭섭한 마음 금할 수 없었다. 우리힘이 자라는 곳까지 發掘(발굴)하여 座臺(좌대)와 함께 一石造(일석조)의 坐佛(좌불)로서 結(결)가실坐(좌)한 如來像(여래상)으로 목에는 三道(삼도)를 둘은 흔적이 缺損(결손)된 頭部(두부)에 남았고 通肩(통견)한 군衣(의) 위에 가사를 맨 매듭 고리가 두곳에 있고 윗 매듭에서 아래로 처진 끈이 길게 座臺(좌대)에 까지 닿았다. 不幸(불행)이지만 地下(지하)에 埋沒(매몰)된 탓으로 衣紋(의문)의 纖細(섬세)한 彫刻(조각)이 鮮明(선명)하였다. 左手(좌수)도 缺損(결손) 되었지만 座臺(좌대)도 주위가 모두 缺損(결손)되어 전체를 發掘(발굴)ᄒᆞ지 않고는 알 수 없었다.

南山(남산)은 허다한 佛蹟(불적)이 많으나 이번 발견된 石佛(석불)은 일부분의 衣紋線(의문선)이 地面(지면)에 露出(노출)되어 있음을 山路傍(산노방) 그나마 오르고 내리는 行人(행인)의 視野(시야)에 닿지 않는 자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필 이번 東大佛敎科(동대불교과) 學生(학생)들의 發見(발견)의 動機(동기)로 光明(광명)을 받게 되었을까. 무슨 因緣(인연)깊은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石佛(석불)의 발견으로 佛敎美術(불교미술)의 貴重(귀중)한 硏究査料(연구사료)로서 영향이 적지 않음을 생각할 때 兩君(양군)이 발견한 功勞(공로)에 깊은 感謝(감사)의 뜻을 表(표)하는 바이다. (像高約二來(상고약이래))

<글쓴이·慶州博物館長(경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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