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혁명이후 우리들의 日常對話(일상대화)가운데 ‘安定(안정)’이란 말이 자주 오고갔다 政局(정국)의 安定(안정)으로부터 經濟(경제), 社會(사회) 등등 安定(안정)되어야 할 것은 많기만 했다.

그리하여 小市民(소시민)의 입에서까지 生活安定(생활안정)을 부르짓는 아우성은 끊임이 없었다. 安定(안정)은 正常的(정상적)인 궤도를 의미한다. 이것은 한강변의 기적이전의 문제이다. ▲ 원만한 균형처럼 아쉬운게 없다. 大學(대학)을 나오는 人材(인재)는 날로 늘어가도 이를 받아드릴만한 進出(진출)의 門戶(문호)는 좁아만 간다. 安定(안정), 곧 균형을 잃어버린 社會(사회)의 비극이 풀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均衡(균형)은 어느한 쪽으로도 치우침이 없이 쪽고름을 의미한다. 우리의 現實(현실)은 너무나 모자란 것이 많다. 빈터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一切(일절)의 것이 몸을 똑바로 가누어가기가 힘들어 지는 것이다.

▲ 흔히 최소한의 ‘安定(안정)’까지를 發展(발전)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發展(발전)은 繁榮(번영)을 말하는 경우에 쓰인다. 즉 얕은 段階(단계)에서 보다 높은 단계로 뛰어오름을 말이다. 우리에게는 약간의 進步(진보)는 있었을지 언정 發展(발전)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소한의 安定(안정) 곧 균형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상 몸부림을 쳐왔다. 허나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깊숙이로 빠져들게 하는 歲月(세월)이었다. 絶望(절망)의 深淵(심연)으로 착잡하게 얼켜 들고있는 것이다.

▲ 요지음 새삼스럽게 大學(대학)의 危機論(위기론)이 대두되었다. 現實(현실)이 安定(안정)을 잃고 요동하든 大學(대학)도 安定(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적오도 大學(대학)에만은 安定(안정)이 保障(보장)되어야 했을 것이다. 安定(안정)된 단계에 이르면 정상화다 뭐다해서 혼란을 이르켰다. 大學(대학)을 國家(국가)의 頭腦(두뇌)라고 말하면서도 大學(대학)의 安定(안정)을 모색해 주지는 않았다. 大學(대학)을 整備(정비)한다드니 오히려 大學(대학)만을 느려 놓았고, 오히려 一部(일부) 傳統(전통)있는 大學(대학)은 萎縮(위축)을 不免(불면)케 했었다.

▲ 우리나라 大學(대학)의 역사도 벌써 半世紀(반세기)가 된다. 半世紀(반세기)를 사람으로치면 一生(일생)에 해당되는 年輪(연륜)이다. 大學(대학)도 많은 成長(성장)을 했다. 그러나 量的(양적)으로는 肥大(비대)해졌을지 몰라도 質的(질적)으로는 오히려 低下(저하)되고 있다. 量(양)과 質(질)이 균형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大學(대학)의 質的(질적) 向上(향상)은 항시 강조되어왔다. 그러나 現狀維持(현상유지)가 언제나 더 큰 比重(비중)을 차지했었다. 그 原因(원인)이야 어디있든 앞으론 質的(질적)으로나 量的(양적)으로 균형이 잡힌 大學(대학)이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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