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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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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蹟發掘隊(고적발굴대)의 成果(성과)를 기뻐하면서 倍前(배전) 奮發(분발)를 促求(촉구)한다.

先人(선인)들이 살다 간 옛 文化(문화)의 자취를 더듬어 밝히려는 本校古蹟發掘隊(본교고적발굴대)의 作業(작업)은 意外(의외)의 成果(성과)를 거두어 學界(학계)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本校(본교) 大學博物館(대학박물관)에서는 史學科(사학과)와 佛敎科(불교과)의 支援(지원)을 받아 지난 달 25일부터 이달 3일까지 忠南(충남) 부여군 石城面 顯北里(석성면 현북리)의 ‘臨江(임강)부락’에서 百濟時代(백제시대)의 寺지(사지)를 發掘(발굴)하였는데 이곳에서 琴堂지(금당지)를 비롯하여 門(문)지와 塔(탑)지,回廊(회랑)지 一部(일부)를 밝혀내는 한편, 各種(각종) 蓮花立瓦(연화입와), 金銅製粧飾具(금동제장식구), 數十點(수십점)의 土製佛像(토제불상) 等(등)을 發掘(발굴)하여 史學界(사학계)의 觀心(관심)을 모으게 된 것이다.

 

지난달 29일부터 本格的(본격적)인 遺構(유구) 調査(조사)를 시작한 發掘隊(발굴대)는 錦江下流(금강하류 扶餘南方(부여남방) 20리 지점의 百濟山城(백제산성)의 産(산)록에서 臨江寺지(임강사지)의 ‘院(원)터’라고 하는데서 整然(정연)하게 配列(배열)된 楚石列(초석열)을 發掘(발굴)하였는데 이초석의 양식은 扶餘(부여) 附近(부근)에서 처음 나오는 立柱形(입주형)이였다고 한다.

 

人工美(인공미)와 自然美(자연미)의 조화로서 이름높은 白帝(백제)사찰의 建築(건축)인지라 이곳 背山臨水(배산임수)의 臨江寺(임강사)는 지난여름 國立博物館作業隊(국립박물관작업대) 의 金剛砂지(금강사지) 發掘(발굴)이후 두 번째로 밝혀진 百濟寺지(백제사지)란 점에서 더욱 意義(의의)가 깊은 것이라 하겠다.

 

博物館長(박물관장) 黃敎授(황교수) 말에 依(의)하면 종래 모든 寺刹(사찰)이 南向(남향)인데 反(반)하여 臨江寺(임강사)는 西(서)쪽을 向(향)하고 있으며 특히 全面(전면) 五(5)간, 측면 四(4)간 자리에서 나타나느 礎石(초석)이 二(이)층基壇(기단)을 이루고 있어 주목되는 것이며, 五方形(오방형)의 礎石(초석) 위에 높이 約(약) 90센티의 石柱(석주)를 얹어 상하 二(2) 단으로 배치한 이와 같은 礎石(초석)은 특이한 구조로 서 부여지구에서는 처음 발견된 것이라 한다.

 

어떻든 이로써 從來(종래) 日人學者(일인학자)들이 彌勒寺(미륵사) 礎石(초석)을 고려時代(시대) 것으로 推定(추정)하였는데 이번 이 二(2)단礎石(초석)의 發掘(발굴)로서 기왕의 우리 學界(학계)의 主張(주장)대로 彌勒寺(미륵사)는 百濟寺刹(백제사찰)임을 뒷받침해주는 귀중한 資料的(자료적) 구실을 하였다.

 

이 建物(건물)지 調査(조사)와 하여 倂行(병행)하여 그 前面東西線上(전면동서선상)에 長50尺 幅三尺(장50척 폭3척)의 試掘?(시굴?)를 掘土(굴토)하여 他 建物(타 건물)지와의 關聯(관련)도 調査 中(조사 중)에 있는 것이다.

 

한편 이 建物(건물)지 西南方(서남방) 瓦片推積層(와편추적층)을 試掘(시굴)하였는데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은 各種(각종) 蓮花紋瓦(연화문와) 佛頭(불두) 衣紋(의문) 佛足(불족) 신 供養像(공양상) 등 여러 가지 資料(자료)와 石製相輪(석제상륜) 등이 出土(출토)되어 塔(탑)의 存在(존재)가 推測(추측)되며 出土品(출토품)으로 보아 百濟(백제) 下代(하대) 7世紀 初(7세기 초) 武王 代(무왕 대)에 창건된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또한 이번 발굴이 극히 部分的(부분적)인 것이긴 하지만 完全(완전)한 規模(규모)의 百濟寺刹(백제사찰)로서 金堂(금당) 자리가 잘 保存(보존)되었고 더욱 그 礎石(초석)의 발견은 앞으로 우리 建築美術(건축미술)의 자랑인 ‘메머드’ 사찰, 彌勒(미륵)사지 여구의 基本的(기본적) 調査(조사)로서 뜻밖의 成果(성과)를 거둔 셈이다.

 

어떻던 가신 이들의 다사로운 香氣(향기)가 어리어있는 역사의 자취를 더듬어 이와 같은 業績(업적)을 거둘 수 있었다는 것은 비단 우리 東大(동대)의 기쁨일뿐 아니라 우리나라 學界全體(학계전체)의 기쁨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우선 자기를 안 然後(연후)에 남을 알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우리의 지나온 자국을 알지 못하고 어찌 남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우리가 알아야만하고 또 알아야 할 일들이 許名(허명)하게 山積(산적)되어있다. 더욱이 볼골사나운 것은 우리의 일들을 우리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많이 硏究(연구)해 놓은 일들이 있는 것을 볼 때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愛國歌(애국가)의 作詞者(작사자) 하나 알아내는 데도 말썽이 있고 異說(이설)이 있었다. 그거이 오래된 일도 아니요 近來(근래)의 일임에도 이럴 때에 하물며 아득한 옛 일에 있어서라. 우리는 古蹟保存(고적보존)에 더욱 살뜰한 손길을 뻗쳐야 할 것이며, 지나온 우리 自身(자신)덜의 자취를 더듬는 이와 같은 發掘作業(발굴작업)에 더욱 뜨거운 協助(협조)와 聲援(성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번 博物館作發掘(박물관작발굴)에 無限(무한)한 ?辭(?사)와 敬意(경의)를 表(표)하면서 앞으로도 이와 같은 意義(의의)있는 事業(사업)이 더욱 ??(??)되어 學界(학계)와 人類(인류)에게 貢獻(공헌)있기를 祈願(기원)하는 바이다.

동대신문  dgupress@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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