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영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날치는 가슴지느러미를 이용해 해수면 위로 날 수 있다. ‘나는 물고기(flying fish)’를 뜻하는 ‘날치’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날치는 보통 수면에서 2m 정도의 높이로 파도 사이로 비행하지만 바람을 잘 만나면 시속 60km의 속도로 4백m까지 날 수 있다고 한다.
날치가 이렇게 물 위로 나는 것은 재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다. 날치는 만새기의 먹이가 되는데, 천적이 공격해 올 때 물 밖으로 솟구쳐 올라 공격을 피하는 것이다. 얼핏 보면 더 오래 날면 더 안전해 보이지만 위험은 물 밖에도 도사리고 있다. 하늘에는 군함새가 수면 위로 날아오르는 날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천적을 피해 물 밖으로 비행하는 것은 기발한 전략이지만 물 밖에서 너무 오래 머물면 하늘에 있는 천적에게 당하고 만다. 너무 높아도 죽음이 기다리고 있고, 너무 낮아도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날치의 목숨은 너무 높지도 않고, 너무 낮지도 않은 딱 그 중간에서 유지되는 셈이다.
이처럼 너무 높거나 너무 낮아서 낭패를 초래하는 두 극단을 불교에서는 ‘양변(兩邊)’이라고 한다. 양변에 치우치는 것은 날치의 경우처럼 위험함으로 마땅히 피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들은 세상을 두 진영으로 나누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를 좋아한다. 나와 남, 정의와 불의, 진보와 보수, 남성과 여성 등으로 나누고 그중 한 쪽에 몰입한다.
더러는 그런 치우침이 지나쳐 반대편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극단적 사유와 행동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쪽으로 치우친 가치관을 갖고 행동하면 적정한 높이를 잃어버린 날치처럼 낭패를 보게 된다. 우리가 구분한 두 극단은 제압하고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고 공존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두 극단에서 물리적 중간, 기계적 중립을 지키라는 것은 아니다.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어느 한 쪽에 치우치는 태도는 마땅히 버려야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양쪽을 모두 포용할 줄 아는 지혜다. 그 두 극단은 서로 기대고 서 있는 갈대 묶음처럼 서로에게 의지해 있기 때문이다.
날치처럼 우리도 어느 한 쪽으로만 치우치면 지혜의 생명은 죽음을 맞이하고, 삶의 평화는 파괴된다. 지혜의 생명과 삶의 평화는 너무 높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낮지도 않은 높이로 나는 비행에 있다. 부처님은 그와 같은 길을 중도(中道)라고 하셨다.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께서 최초로 하신 법문도 이와 같은 중도의 지혜에 관한 것이다. 무엇을 하든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지 않고 적정한 균형을 유지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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