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영 다르마칼리지 조교수

21세기 신자유주의 시대 한국사회에서 대학의 위상이 소위 취업학원이나 직업훈련소 정도로 전락했다고 하더라도, 고등교육기관으로서 대학은 학문을 하는 곳이다. ‘학문(學問)’은 그 문자 그대로 배우는 데[學]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묻는 데[問]까지 나아가는 것을 이른다. 그런데 우리는 잘 묻지 않는다. 일차적으로 그것은 중등교과과정까지 학교 교육을 중심으로 한 교육시스템 속에서 기존의 학문지식을 습득하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정답’을 찾는 데 혈안이 되었던 것이지, 그것이 왜 정답인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고, 물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묻는 행위 자체를 금기시하는 체제의 질서와 문법이 우리로 하여금 회의와 의심, 질문이라는 비판적 실천 행위를 통제하게 했다는 데 있다. 모든 것이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경제적 논리로 재단되고, 오직 그것에 의해 인간의 존재 이유와 삶의 가치가 평가되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청년 세대로서 대학생은, 회의하고 의심하기보다는 기존의 강고한 체제에 편입되는 데 몰두한다.
마치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사회의 낙오자가 되기라도 하는 양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앞다퉈 수용하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우리는 관습적 사고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물론 기존 사회의 질서와 가치를 내면화하고 재생산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사회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관습적 사고를 재생산하는 데 머무른다면, 나와 사회는 변화하지 않는다. 아무리 혁명이 장구한 시간을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인간의 자기 정립과 사회 구조의 변동 과정이 역사 속에서 잘 두드러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역사는 진보와 혁신의 방향성을 가지고 전개돼왔다. 그리고 그 핵심적인 동력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묻는 힘, 바로 비판적 실천 행위를 수행하는 데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기에 대해 회의하고, 사회 구조의 재생산 과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나와 우리를 둘러싼 이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인간의 역사를 이끌어온 것이다. 
고등교육기관으로서 대학이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비판적 실천 행위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양성하는 데 있다. 대학의 교육을 통해 우리는 세계 속의 존재로서 자기를 성찰하고, 타인과 조화로운 관계를 모색하며, 더 나은 방향으로 사회를 변혁시켜나갈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묻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일단, 묻자. 스스로 자신의 질문이 성립 가능한 것인지, 본질에 다가서기 위한 핵심적인 것인지, ‘검열’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뒤로 미뤄두고, 묻고 또 묻자. 조금이라도 의문이 든다면, 주저하지 말고 물어야 한다. 물론 질문은 잘 해야 한다. 좋은 질문이 좋은 답을 낳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문을 잘 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회의하고 의심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회의와 의심의 과정에서 이쯤이면 되었다는 안일한 자기 타협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결코 끝나지 않는 질문을 계속해서 제기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 답을 얻을 수 있다. 
아니, 그래야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자신을 위치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때에야 비로소 자신만의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 입장과 관점을 말할 수 있게 된다. 비판적 인식의 주체로서 다른 사람과 같은 나가 아닌, 다른 사람과 다른 나가 되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지난 10여 년 동안 동국대학교 강의실에서 만났던 학생들과 함께했던 시간이 즐거웠던 것은 1/N이 아닌 N과 다른 1이 되고자 한 그들의 냉철한 질문들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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