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VO SPAIN] 스페인여행 (7) In 마드리드 : 차이니즈 걸, 그리고 니하오

▲한적하고 볕 잘 드는 부엔 레티로 공원의 잔디밭. 월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도 별로 없다.

“Chinese girl.”
내 뒤통수에 갑자기 이 단어가 꽂혔다. 뒤를 돌아보니 아까 그 남자다.

그동안 스페인 여행을 하면서 인종차별을 심하게 겪은 적은 없었다. 대체로 사람들은 친절했다. 종종 길을 걷다가 뜬금없이 ‘니하오’하고 인사를 듣거나 다소 민망할 정도로 신기하다는 듯 나를 뚫어지게 보는 경우가 다였다. 어떻게 보면 운이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내가 알아채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다만 심한 위협을 받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부엔 레티로 공원에서 서브웨이 샌드위치와 책 한 권. 완벽한 오후다.

그 날은 부엔 레티로 공원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워낙 넓은 공원이라 한적하고 볕이 잘 드는 곳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무 밑동에 앉아 책을 읽으며 샌드위치 하나를 뚝딱 먹었다. 선선한 가을 날씨에 적당히 따뜻한 4시의 볕은 휴식을 위한 완벽한 조건이었다. 책을 한참 읽고 있을 무렵, 등 뒤에서 ‘헤이’하면서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무시하다가 계속 아는 척하는 소리만 반복되어 뒤를 돌아보았다. 한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는 한 손엔 담배를, 다른 한 손엔 라이터를 들고 있었다. 다소 껄렁껄렁한 자세로 나와 대화하고 싶다고 영어로 말했다. 그다지 깨끗해 보이지 않는 옷과 신발에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를 잠시 무시하고 주변을 훑어보았다. 주변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는 영어를 못 알아듣는 척하며 일본어로 말했다. 대충 못 알아듣는 척하고 못 알아듣는 말을 하면 순순히 돌아가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스페인어로 ‘저기 가서 나랑 이야기하자’며 하는 말에 단호하게 ‘No’라고 거절했다. 그는 ‘잠깐인데도?’하면서 나에게 위협감을 주었다. 나는 다시 ‘No’라고 거절했다. 그는 그제 서야 돌아갔다. 순순히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고 나는 다시 안 오겠구나 싶어서 마저 책을 읽었다.
담배 한 대를 다 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뒤통수에서 ‘Chinese girl’이라는 단어와 함께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아까 그 비루한 남자가 다섯 발자국 뒤에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동양인 여자가 자신을 거절하다니, 하는 불만이 들렸다. 나는 한숨을 쉬며 욕을 한 바가지 할까 생각했지만 위협감이 들어 폰을 꺼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하며 사람이 많이 있는 공원 한 가운데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더 쫓아오진 않았다.  

그 태도는 동양인과 여성이라는 나의 정체성을 건드리는 무례함으로 기억되었다. 이 낯선 폭력에 스페인의 기억이 낯설어졌다. 그러다 다시 마음을 다 잡았다. 어디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이 있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완벽하게 부인할 수 없다. 그러니 이 일로 내가 만난 스페인 사람들을 모두 부정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다음 날 다시 부엔 레티로 공원을 찾았다. 그 남자가 뺏어간 그 공원의 평화로운 추억을 되찾기 위해서. 그리고 그 다음 날도 그 공원에 갈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가는 비행기를 탈 땐, 이번 여행 참 즐거웠다고 되새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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