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권섭 중앙여고 교사(국문89졸)

사람들이 오랫동안 바로잡으려 했지만 그러지 못한 것이 여러 가지다. 지인이 불우해지면 그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세태도 그중 하나다. 사람은 사람 사이[人間]에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인간일 수 있다고 여기면서도 행동은 이를 실천하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인간관계를 소중하게 여겨야 함을 일깨우는 사례가 많이 전한다.

적공(翟公)이 정위(廷尉)가 되었을 때는 빈객이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었으나, 면직되고 나니까 모두 발길을 끊는 바람에 집안이 너무나 고적해 마치 ‘문밖에 새그물을 쳐 놓은 것’ 같았다는 문전작라(門前雀羅) 이야기가 남아 있다. 추사 김정희가 ‘잘 나가던’ 시절과 제주도 유배 시절에 그를 대하는 제자 이상적의 ‘한결같음’이 없었다면 「세한도(歲寒圖)」는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이 급변하면서 인간관계를 헌신짝처럼 여기는 세태가 확산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리다. 유선 전화밖에 없던 시절에 교문을 나섰던 학생들은 동창회가 잦지만, 휴대폰을 들고 졸업한 이들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나는 이러한 변화가 돈 되는 일이 아니면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으려는 세태와 무관하지 않다고 여긴다. 최승자 시인이 「자본족」에서 ‘새들도 자본 자본 하며 울 날이 오리라’고 예견했던 것은 20여 년 전의 일이다.

대학은 학문을 닦는 곳이며, 진짜 학문은 인간관계를 으뜸으로 여기는 데서 출발한다. 지난 3월, 나는 대학 시절의 은사 한용환 선생님의 부음을 들었다. 영정 앞에 엎드리기도 전에 울음이 터져 나왔다. 졸업 후 28년 동안 매년 찾아뵙던 즐거움이 사라졌다는 슬픔에 오랫동안 어깨를 들썩였다.

대학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사제관계는 사라진 지 오래고, ‘대학 동문’이란 단어에 미소 짓는 사람이 줄어든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취업도 중요하고, 이를 위한 경력 쌓기나 자격증 취득이 시급하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수시로 누르는 ‘좋아요’가 우리를 연결해 주지는 않는다. 졸업 후에도 평생 찾아뵙고 싶은 은사, 언제나 반겨 맞을 선후배를 만났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학문은 머리로 시작해서 몸에서 완성된다. 동악(東岳)의 가을이 이런 생각들로 채워지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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