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탈리즘 속 제국주의 극복위해선 역사속에서 민주주의적 가치관 부활해야

▲박홍규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
지은이: 박홍규
펴낸이: 우물이 있는집
“젊은 벗이여, 고독해라.” 누가 이런 말을 하는가. 모두 다 “외롭다” 면서, 그 고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시대에 말이다. ‘박홍규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의 저자, 박홍규(영남대 법대) 교수이다. ‘주제와 변주’(인더고서원 엮음, 궁리, 2006)에서, 이 말을 듣고 나서부터 나는 그의 팬이 되었다. 그런데 그의 피은(避隱)은 나보다 몇 배 더 철저하다. 심지어 상갓집에도 안 간다 하니 말이다.

‘주제와 변주’를 보면, 그의 책은 대개 화가 나서 쓴 발분(發憤)의 서(書)임을 알 수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번역부터가 그랬다 한다. 좋은 책인데, 누군가 번역해 주기를 기다렸으나 아무도 번역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다리다 못해 스스로 했다는 이야기다.

‘박홍규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 역시 마찬가지다. 많은 분노가 담겨져 있다. 그는 사이드가 20세기의 위대한 사상가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제대로 읽히지 못하고 있는 우리 현실에 대한 분노를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을 통하여 제국주의의 뿌리를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운동권은 외면하였고, 중요한 영문학자 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영문학계에서는 사이드를 잘 언급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다. ‘문화와 제국주의’같은 사이드의 저서는 오역으로 범벅되어 있는데, 그 출판사는 개정판을 내지 않고 있다며 화를 낸다.

서양의 미술, 영화, 스포츠에 나타는 제국주의에 대해서까지 그는 화를 내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화를 내는 일이 단순히 성질이 나서는 아닐 것이다. 뭔가 새로운 것을 건설하기 위해서이리라. 새로운 그 무엇은 타자와의 올바른 관계맺음이라고 본다. 이때 ‘타자’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에게는 서양이다. 서양문화다. 근대로 들어오면서 동양은, 동아시아든 인도이든 모두 서양의 충격 앞에 적나라해졌다. 여전히 어려운 숙제이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첫째 무조건적 거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전략은 먹혀들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더 이상 척화비를 세울 수는 없다. 둘째, 서양에 의해서 동양을 고치고 재조정하자는 것이다. 이에는 필연적으로 서양에 의한 동양의 왜곡이 이루어진다.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이라 지칭하면서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관점이다. 그러한 저들의 오리엔탈리즘을 우리 안에 내면화시킬 때,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이 된다. 셋째, 전통 속에서 동양의 정체성을 찾아 그 속으로 숨는 것이다. 동양학, 국학, 한국학이라는 개념들이 논해지는 마당이다. 저자는 이 세 번째 시도 역시 강하게 비판한다.(「보론 : 소위 국학에 대한 비판」 참조) 그 역시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을 동양이 내면화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일종의 변형된 오리엔탈리즘이라 볼 수 있다.(이 점을 정밀하게 밝힌 것은 강상중,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이다.)

그럼 대안은? 저자는 인권, 평화, 평등, 자유, 자결, 자율, 생명, 생존, 노동(p.129)과 같은 민주주의적 가치관을 제시한다. 그런데, 그것은 서양 것이 아니냐? 그렇지 않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전통을 우리 역사에서 확인하고, 그것을 재흥하는 것”(p.395)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가치는 서양 안에서도, 동양 안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나같이, 기본적으로 동양을 공부하는 사람도 서양을 보다 열심히 공부해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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