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시절부터 사귀어온 여자 친구와 헤어지게 되었을   
때, 어린 심정에 들었던 절망감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세상이 그 자리에서 끝난 것 같았고 삶의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또 시간은 흘러갔고, 아련하고 아쉬운 추억으로 남았을뿐 내 인생이 바뀌거나 중대한 전환점이 되진 않았다. 어쨌든 그와 이별을 했다고 해서 내가 살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저 청춘의 한 시절이 그렇게 마감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그렇다. 사랑하는 연인이나 가족과 사별을 하면서도 살 수 있는 것이고, 열심히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너>가 없이는 못 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물과   ▲ 불교신문 논설위원, 시인
공기가 없으면 못 사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나>가 없이는
못 사는 것이다. 그러나 <너>가 없이는 못 산다고 사람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것이 자살이나 스토커, 또는 데이트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물론 <나>는 <너>와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우리라는 공동체 속에서 살아야 하는게 인간이다. 그렇지만 그 어느 것도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고정된 그 어떤 것을 바라며 그것을 절대화시킬 경우 우리 모두는 피곤해지고 괴로워진다. <너>라는 조건 속에서 이루어지는 관념은 허망하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부른다. 이 세상에 고정돼 있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만일 내가 빨간색만 아름다운 색이라고 고집한다면 파란색을 나의 적이 될 수 밖에 없다.

연인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취미나 취향은 변할 수 있는 것이고, 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상대방을 억지로 바꾸려 한다면 서로 다툼이 일어나고 만남 자체가 괴로워진다.

그래서 <너> 없이는 못 사는 게 아니라, <나>에게 맞춰진 <너>라는 조건 때문에 절망하고, 그것이 극단화되면 서로가 불행해지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허위의식이다. 사실은 <너>가 그렇게 만드는 게 아니라, 내 욕망이 그런 선택과 불행을 자초한다.

물론 사랑을 하든 삶을 살든 거기에는 진정성이 있어야 하고, 그럼으로써 내가 먼저 희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서로 없이는 못살 것 같아도 삶은 여러 다른 관계망 속에서 새롭게 펼쳐진다. 중요한 건 서로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일이다. 그럴 때만이 참되고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광장에서 촛불이 연 봄이 화창하고 맑은 세상을 수놓았으면 좋겠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