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진(법학16)

“야, 우리 동대신문 들어갈래?” 내 수습기자 생활의 시작이었다. 동대신문을 교내 동아리쯤으로 생각했던 나는 동아리 입부지원서가 아닌 입‘사’지원서를 받아들고 의아해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형식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내 안일함이 나중에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그땐 알지 못했다.

내가 처음 조판에 참여한 것은 동대신문 1581호였다. 첫 기획회의를 통해 탈북사회 기획기사의 서브 기사를 맡았다. 서브 기사는 ‘통일 전문가를 원하는 우리 사회의 목소리에 우리대학이 응답 가능한지’를 알아보는 내용이었다. 북한학과 교수님들과 학생들의 인터뷰를 하기 위해 학교를 열심히 뛰어다녔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다르게 교수님들과 연락이 닿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연락이 닿았다 하더라도 과 내부의 민감한 사안을 인터뷰하는 일은 더욱 어려웠다. 거의 일주일간 교수실과 조교실에 전화와 문자를 돌렸다. 그 결과 북한학과 학장님이 인터뷰에 응해주셨다. 처음엔 인터뷰에 호의적이지 않으셨던 교수님은 어느새 내게 웃음을 보이시며 질문에 답해주셨다. 

첫 인터뷰였기 때문에 혹시라도 빠트린 내용이 있을까 몹시 긴장되었다. 하지만 긴장이 풀리면서 내가 여쭤보고 싶었던 내용이 정리되었고 그렇게 나의 첫 인터뷰는 나름 성공적으로 끝났다. 인터뷰에 성공했다는 기쁨도 잠시, 인터뷰를 기사에 녹여내는 일은 내가 생각했던 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브 기사와 학내보도 단신, 회전무대가 한 번에 내 앞으로 닥쳐오니 정신이 너무 없었고 동대신문에 들어온 것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전공수업 시간에 기사를 쓰는 나 자신이 한심해 보이기도 하고 ‘내 것도 못 챙기면서 신문사 활동을 하는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없던 조판 기간은 금세 지나갔다. 그동안 몰랐지만, 학교 곳곳에 동대신문이 비치돼 있었다. 혜화관에서 법학관을 지날 때 신문 배부대가 눈에 밟혔지만 민망한 마음이 들어 펼쳐보지 못했다. 1581호 평가회의 한 시간 전 내가 쓴 기사를 지면으로 처음 보았다. 
처음엔 어색하고 누가 보지 않았으면 싶었다. 계속 볼수록 지면에 내 이름과 수습 기자라는 직책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이효진'이라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한 소식을 전달할 수 있는 플랫폼이 될 수 있다는 점은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탈수습기를 쓴 뒤, 이제 내 이름 뒤에 ‘수습’이라는 단어는 붙지 않는다. 하지만 그 단어 대신 기사에 대한 책임감의 무게가 불어난다. 아직은 정기자가 되는 것이 떨떠름하다. 
단지 신문사에 내 자리가 생기게 되어 신날 뿐이다. 내가 기자로서 첫 책임감을 느꼈던 1581호처럼 이번 1583호를 받아든 나에게 앞으로 동대신문이 어떤 의미를 이루게 될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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