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기 철학과 교수

학과에 부임하면서 2011년까지 꾸준히 실시하던 학부생 스터디를 2012년부터 전면 중단하였다. 강의 외 시간 내기가 나도 어려웠지만 이 때부터 학생 시간 맞추기가 정말 어려워졌다. 저녁이나 주말 시간을 알바로 때우는 학생들이 부쩍 늘어나고 취직 공부로 철학을 돌아볼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별도로 더 철학 공부하고려는 학부생이 있으면 대학원생 중심 인문사회과학 전문연구모임으로 2002년부터 매주 여는 ‘관심공동체’에 참여시켰다. 
그런데 이 ‘관심공동체’에서 선배들과 어깨를 맞대며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독파해낸 영은이 2014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뒤로 이 모임에 들어오는 학부생이 한 명도 없었다. 결국 강의를 제외하고 철학과 학부생과 인격적·학문적 교류를 할 수 있는 통로는 소멸되었다. 이러다 보니 개강 초기뿐만 아니라 학기 중에도 얼굴 모르는 철학과 학생들을 마주치는 일이 빈번이 일어난다. 
하지만 철학과 대학원은 학부와 전혀 대조적이다. 2010년도를 전후하여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마흔 살 이상의 중장년 남녀분들이 대거 대학원에 들어왔다. 개중에는 일흔을 바라보는 퇴임자들도 계시다. 
석사나 박사 학위를 받더라도 대학에서 강의하거나 교수로 임용될 가능성은 전혀(?) 없는 이런 분들에게는 젊은 연령의 철학과 학부생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공통된 특징이 있다. 그것은 당신들의 사회적 성공이나 생활의 안정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풀고 싶은, 그야말로 인생의 문제 한 가지씩은 꼭 갖고 있다는 것이다. 운명에 대한 궁금증이기도 하고, 내가 연주하는 악기의 소리가 왜 이렇게 울려야하는지를 알려는 대책 없는 호기심이기도 하고, 성공한 보험업에서는 풀리지 않은 내 삶의 의미일 수도 있다. 철학책 하나 읽어볼 시간 없이 살아온 인생 동안 공부할 모든 능력을 갖추었으면서도 철학만 안 해봤다고 생각하여 철학 배운 교수에게 몰려온다. 
이분들을 통해 참으로 기묘한 경험이 반복되는데, 내게는 그저 ‘전공 지식’인 철학이 그분들에게 한 마디 건너가면 ‘삶의 지혜’로 살아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학문과 인생의 아름다운 만남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출판 시장에서도 그렇고 창조경제를 위한 학문 융·복합에서도 그렇고, 철학은 도처에서 성공하고 있다. 인생을 위해서나 경제 돈벌이를 위해서나 철학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데 대학에서는 철학과의 기를 죽이는 일이 염치없이 자행된다. 대학의 자해행위이고, 국가 자멸의 길을 닦는 짓이 아닐 수 없는데, 그걸 알고나 그러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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