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국 시인

글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권의 책’을 옆에 두고 있다. 글이 안 써질 때, 들춰보게 되는 일종의 매뉴얼 같은 책이다. 꼭 글 쓰는 사람이 아니라도 그럴 것이다.
나의 ‘인생책’은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 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이다. 글이 안 써질 때면 꼭 이 책을 먼저 꺼내들게 된다. 이 책은 독특하게도 글쓰기에 선(禪)체험이 접목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글쓰기뿐만 아니라 삶의 문제에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 중에서 자주 펴보는 구절은 이 부분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게으르며 불안정하고 자기혐오나 두려움에 쌓인 존재, 정말 말할 가치도 없는 존재라는 사실과 직면하는 순간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그때 당신은 더 이상 어디로도 도망을 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것이다. 이제 당신은 별 수 없이 자신의 마음을 종이 위에 풀어 놓아야 하며, 그 가련한 목소리가 들려주는 말을 경청해야 한다.”
글을 쓰다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문장부터 시작할 때가 있다. 심한 경우, 너무도 유치하고 조악해서 구역질이 날 것 같기도 하다. 그때의 자기모멸감이란 뭐라 말하기 힘들다. 그 다음은 말할 것도 없다. 노트를 덮고 일어서게 된다. 그러면 나중에 쓴다할지라도 실패한 글이 되고 만다. 청탁에 쫓기고, 억지로 만들어서 부랴부랴 끝낸 글이니 안 그럴 도리가 없다. 나탈리 골드버그는 바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먼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처음 글을 썼을 때의 마음을 이렇게 풀어놓는다.
“그 시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그런 산만한 마음과 그 동안 살았던 인생이 전부였다. 나는 거기서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를 앞서 말한 글쓰기 상황에 적용하자면 이렇다. 유치하고 조악한 문장으로 시작했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우선 인정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런 자신을 인정하고, 다음 문장을 써나간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되지 않는다. 어쩌면 영원히 글을 못 쓰게 될 수도 있다. 골드버그의 친구는 그녀의 두꺼운 습작노트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나탈리, 나는 네가 ‘이런 일을 하는 나는 정말 바보다’라는 생각을 할 때조차, 그 사실을 계속해서 글로 옮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이는 삶에도 적용될 수 있다. 무언가를 시작할 때, 이리저리 비교하다 보면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우선 그 사실을 인정하고, 어떻게든 계속해 나간다. 그러면 그 다음이 있지 않을까. 진정한 시작은 처음이 아니라, 그 다음부터인지도 모른다. 나탈리 골드버그는 25년간 선(禪)을 수련하고 글을 써왔다. 결과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수련하고 썼다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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