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다운 / 정치외교학과12

많이 불편하셨을 겁니다. 지금도 그 불편함이 채 가시지 않으셨겠지요.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더 불편하십시오!”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그것 뿐입니다.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에 많은 남성들이 불편해하고 있습니다. ‘정신병자가 저지른 범죄에 왜 모든 남자가 가해자냐’, ‘명백한 남성혐오다’ 등 남성들이 느낀 당황은 이내 격한 반발로 나타났습니다. 남성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여성이 약자라는 현실보다 오히려 ‘남성이 강자’라는 사실인 듯합니다.
지난날에는 몰랐습니다. 명절날 모인 가족들 틈에서 조용히 일어나 밥상을 차리고 부엌에서 밥을 먹던 누나들, ‘남자가 반장을 하고 여자가 부반장을 해야지’라고 하시던 담임선생님, 무심코 짝에게 던진 ‘넌 여자애가 겁도 없냐’는 말, 버스 운전석에 앉아있는 생소한 여기사에 대한 어색함까지. 남자로서 당연히 여기고 행했던 것들이 여성에게는 차별이고 폭력이자 혐오일 수도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여성혐오라는 죄목 앞에서 저는 특권을 누리며 침묵한 비열한 강자였고 명백한 ‘가해자’였습니다. 여러분께도 여쭙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지난날은 어땠습니까?
“여자가 무시해서 죽였다”고 합니다. 아마 그 살인자가 만난 여성들은 ‘조신’하지도, 남자 앞에서 ‘수동적’이지 않았겠지요. 남자의 말에 ‘감히’ 반박하고 자기생각을 얘기했을 겁니다. 여타의 남성들은 약간의 당혹감을 느끼고 말았겠지만 그는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그의 정신병 여부는 중요치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범행의 원인이 된 그의 여성인식의 상당부분을 우리 남자들도 공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원인은 우리 남성이 여성에게 강요하고 있는 ‘여성상’입니다. ‘여자는 조신해야지’, ‘여자잖아?’ 등. 우리는 일상에서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여성에게 틀을 씌워왔습니다. 그날의 끔찍한 범죄는 남성이 강요하는 그 차별적 특권을 거부하는 것이 언제든 끔찍한 폭력으로 돌변할 수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도 결국 이와 같은 남성의 ‘잠재적 폭력성’에 대한 여성들의 불안함이 반영된 절규가 아닐까합니다. 불편하십니까? 남성과 사회가 강요하는 보편적인 여성차별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여성은 잠재적 피해자이고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더 불편하십시오! 성별이 살인의 이유가 되는 이 남루한 사회에서 남성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특권은 없습니다. 오늘도 누군가는 어두운 골목길에서 발걸음을 재촉해야 할 것이고 말 못할 두려움에 화장실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려야 할 겁니다. 더더욱 불편하십시오! 이 사회의 절반이 넘는 여성이 느끼는 불안함을 우리가 있는 그대로 느끼지 못하는 한, 그 불안함에 몸서리치며 이 지긋지긋한 여성혐오를 뿌리 뽑지 않는 한, 우리의 불편함을 끝낼 방법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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