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주간, 투명한 비눗방울들이 내 눈앞을 둥실둥실 떠다녔다. 눈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내 눈 앞에 있는 것들이 문제를 안고 있었다.
사뮈엘 베케트의 소설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작품 내내 ‘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린다. 흔히 ‘고도’는 자유, 해방을 상징한다고 한다. 지금, 우리대학의 ‘고도’는 비눗방울 속에 있다. 작은 힘으로도 톡, 터져버리는 비눗방울 속에 말이다.
작년부터 우리 대학은 심각한 병에 시달리고 있다. 총장 취임으로 시작된 병적 사태가, 지성의 전당이 되어야 할 대학을 분란과 대립의 온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작년 내내 우리는 이명과도 같은 학내 사태들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다. 시간이 지나면 ‘고도’가 올 것이라 기대했다.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모두가 그 부조리극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이 병은 점점 더 내부로 곪아 들어가고 있다. 대학이 헌법에 명시된 무죄 추정의 원칙마저 무시하고 교수를 해임하는가 하면, 학생을 고소하고 있다.
그야말로 비이성이 난무하고 있는 상황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가 없다.
부처의 자비를 실천해야 할 종립대학을 무자비가 지배하고 있는 셈 아닌가. 그렇다면 이 무자비한 대학은 과연 누구를 위한 대학인가? 부처를 위한 대학인가, 아니면 학생을 위한 대학인가? 적어도 반대자를 위한 대학은 아닐 것이다.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들’이 벌인 ‘반대 교수 해임’, ‘반대 학생 고소’ 등 사건이 어떤 의도로 행해졌는지는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정상적인 행보로 볼 수 없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대학 내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도 모자랄 이 시기에 갈등과 논란의 불꽃을 한 층 더 거세게 지핀 꼴이다.
대학은 야만사회가 아니다. 대학은 광장이다. 어떤 형태로든 대립이 존재할 수 있지만, 소통을 통해 해소되어야 한다. 누구도 이 광장에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다.
교수, 학생, 총장을 포함에 누구든, 언젠가는 이 광장을 떠나는 때가 올 것이다. 이후에 이 광장에 찾아올 이들이 이 사건을 ‘처형’으로 보게 된다면, 얼마나 부끄러울 것인가.
반대자를 위한 대학은 없다. 비눗방울 속 ‘고도’가 터질듯 말듯 두둥실 날아간다. 그 배후엔 이성의 불모지가 된 대학이 있다. 부조리극의 종막은 아직 멀게만 느껴진다.
오로지 부끄러움만이 이 부조리극을 목격한, 목격해야만 하는 눈 뜬 자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