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교 110주년 특집기획 동국을 만드는 나눔 <2> 초허당 권오춘(영문61졸) 동문

   
 

‘세인찰찰 아독매매(世人察察 我獨呆呆)’, 세인들은 견주고 살펴서 모두 똑똑한데 나만 홀로 우둔하고 답답하고 어리석네. 권오춘(영문61졸) 동문의 명함에 쓰인 글이다. 권 동문의 겸손한 성품이 그대로 묻어나 있다. 그는 검소하고 소박하지만 나눔에 있어서는 아낌이 없는, 진정한 마음의 부자다.

“내 인생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참 잡초 같은 인생이더라고.”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극복해나간 자신의 삶을 잡초에 비유한 ‘초허당(草墟堂)’ 권오춘(영문61졸) 동문. 그는 마치 손주들을 위해 이야기보따리를 한 아름 풀어 놓는 푸근한 할아버지 같았다. 소박한 모습 뒤에 숨겨진 파란만장한 인생, 초허당 장학 재단 이사장 권오춘 동문을 만났다.

 

“살아 있는 현재 속에서 행동하라”

그의 이야기는 눈에 띄는 곳에 놓아둔 작은 액자로부터 시작됐다. 액자 속에는 한 편의 시가 담겨 있었다. 미국 낭만파 시인 롱펠로의 ‘인생찬가’였다. 올해 팔순이 된 권 동문은 ‘인생찬가’를 처음 접했던 그 순간을 아직까지 잊지 못한다. 사연은 권 동문의 학창시절인 20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권 동문은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대입 시험을 볼 수 없었다. 친구들의 대학 입학 소식이 연이어 들려오며 크게 좌절하고 있을 무렵, 친한 선배로부터 한 권의 시집을 받게 된다. 이 시집에서 롱펠로의 ‘인생찬가’를 읽고 그는 큰 영감을 받는다.

“하나의 섬광이 한순간에 뇌리에 스치는 느낌이랄까. 이 대목이 마음에 크게 와 닿아서 팔순이 된 지금까지 그 순간이 잊히지가 않아.”

그는 시의 한 대목을 힘주어 읊조리기 시작했다.

“Act- act in the living present! Let us, then, be up and doing” (행동하라, 살아 있는 현재 속에서 행동하라! 그러니 이제 우리 일어나 무엇이든 하자) 이 대목을 통해 ‘행동’과 ‘현재’의 중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우리는 영원한 미래가 아닌 ‘찰나’를 살아가는 것”이라며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지금, ‘현재’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중요한 이 현재를 스스로의 행동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라고 느껴 좌절에서 벗어나 다시금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이 시를 통해 새로운 삶의 방식과 지혜를 터득한 것이다. 권 동문은 자신의 삶을 회상하며 “여기저기 도전하고 행동한 인생 80년이 꼭 사춘기 같다”며 소년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인생의 유일한 스승, ‘고통과 고난’

당찼던 학창시절의 권 동문에게는 남모를 아픔도 있었다. 한국 전쟁 직후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권 동문은 노모를 부양하기 위해 학업과 여러 가지 궂은일을 병행해야만 했다. 텃세 심한 ‘아재’와 담판을 지어가며 남대문에서 손수레로 짐 나르는 일도 해봤지만 학업과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권 동문은 보수가 높은 일을 새로 찾아야만 했다.

“그 당시에 시신 닦는 일이 다른 일에 비해 보수가 20배 정도 높았어. 상을 당한 집에 찾아가서 시신을 닦았지. 내가 막내여서 그중에서도 가장 궂은일을 맡아야 했지만 아주 정성껏 닦았어. 그 모습을 보고는 상주들이 돈을 더 챙겨주기도 했었지.”

권 동문에게 죽음을 다뤘던 당시의 경험은 생계를 위해 해야만 했던 궂은일 그 이상의 더 큰 의미가 있다.

“생활이 어려워 시신 닦는 일을 하면서 죽음을 가까이에서 보고 느꼈던 경험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스승이었어. 내 인생 단 하나의 유일한 스승은 바로 ‘고통과 고난’이야. 그렇기 때문에 고통을 짊어지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해.”

당시의 경험을 잊지 못한 권 동문은 약 20년 전에 사후 본인의 시신을 연구용으로 기증하기로 약속했다.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아내와 자녀를 비롯한 지인들에게 시신기증을 권유하며 의학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단순한 기부 아닌 ‘기회’를 주고자

권 동문은 초허당 장학 재단을 운영하며 문화·예술계 지원을 비롯해 어려운 환경에 있는 학생들을 위한 후원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수십 년째 모든 수입의 20%를 따로 저축해왔다. 오로지 기부를 이어가기 위해서다. 동파이프 총판업을 운영하며 두 번이나 부도를 당해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도 기부를 위해 저축해 놓은 돈은 절대 손대지 않았다. 기부에 대한 권 동문의 신념은 그만큼 확고하다.

권 동문에게 기부란 어떤 의미일까. 그는 기부를 통해 돈이 아닌 ‘기회’를 주고 싶다고 말한다. 그 속에는 권 동문이 직접 겪었던 학창시절의 어려움이 그대로 묻어나 있었다. “사실 큰 뜻이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살아봤기 때문에 이 작은 도움이 엄청난 힘이 되고 용기가 된다는 걸 알아. 그래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학생들에게 그냥 기회를 주고 싶은 거야.”

그래서인지 권 동문의 장학금은 조금 특별하다. 기존의 장학금이 주로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다면, 권 동문의 장학금은 성적이 낮아도 생활 형편이 어려운 지방 출신 학생들에게 기회가 주어진다.

후원을 받는 학생들이 직접 쓴 편지를 읽을 때면 권 동문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곤 한다. 그 어떤 감사의 말보다 ‘우리도 열심히 살아서 나중에 꼭 선생님처럼 어려운 후배들을 돕고 싶다’라는 내용을 읽을 때마다 큰 감동을 받는다고 한다. 우리 동국인이 미래의 동국인에 발판이 되어 권 동문이 준 기회에 보답하고 보다 큰 감동을 줄 날을 기대해본다.

 

‘자신의 다락방’을 들여다봐야

이학 계열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을 비롯해 학교 발전을 위해 거액의 재산을 기부한 권 동문은 모교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는 참된 학문과 대학의 의미를 강조하며 후배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학문이란 세상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탐구하는 것이고, 대학이란 뜻 그대로 ‘크게 배우는 곳’으로 학문을 더 깊이, 더 넓게 배울 수 있어야 해.”

덧붙여 “대학은 학문을 완성하는 곳이 아닌 학문을 배우기 위한 기초와 준비 과정”이라며 참된 대학의 의미가 취업을 위한 스펙의 일종으로 전락한 현 세태를 꼬집었다.

“너는 너만의 다락방을 가지고 있어. 우리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쉽게 비교하곤 하는데 그럴 필요 없어. 자신에게 솔직하고 자신의 다락방을 들여다봐야 해.”권 동문은 오늘날의 치열한 경쟁 사회를 살아가며 자신감이 부족한 학생들에게 의미심장한 격려의 말을 전했다.

과열된 스펙 경쟁과 함께 구직난이 점점 심화되는 오늘날, 우리 청년들에게는 내가 아닌 남이, 이 사회가 들이대는 여러 가지 잣대들이 존재한다. 이 수많은 잣대는 과연 옳은 것일까. 오늘은 우리의 다락방을 한 번 들여다보자. 그리고 고민해보자. ‘진짜’ 기준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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